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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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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백만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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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을지문덕은 우리나라 4천년 역사에 유일무이한 위인일 뿐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 때 나라와 겨레를 구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민족적 위인이며 불세출의 전쟁 영웅이다.

그러나 똑같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바꾼 무인이지만 조선시대 인물인 이순신 장군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지만, 을지문덕 장군에 관한 기록은 너무나 빈약하여 단재도 그의 전기를 짓는데 매우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을지문덕에 관한 내용이 <삼국사기>에 매우 간략하게 나오고, 중국측 기록에 실린 것도 겨우 한두 줄에 불과했기 때문에 단재가 그토록 한탄했던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아도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언제 태어나 언제까지 어떤 벼슬을 지냈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며 극찬과 존경을 바친 을지문덕의 기록이 거의 다 사라져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고구려의 멸망으로 고구려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고구려의 역사책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더라도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100권에 이르는 <유기(留記)>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바 있고, 살수대첩이 있기 12년 전인 영양왕(?陽王) 11년(600년) 1월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를 요약한 <신집(新集)> 5권을 편찬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둘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참고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구 삼국사>나 <고기> 같은 옛 역사책에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 간의 전쟁 기사는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그에 따른 국가의 멸망에 따라 사서를 편찬할 경황이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 또한 만에 하나 이러한 기록이 중국이나 고려에 남아 있었더라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구려 측의 기록보다는 중국 측 기록에 훨씬 더 의존했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의 첫 번째 인물인 김유신(金庾信) 편의 끝부분에 이런 말을 달아놓았다.

 -…지략이 특출한 을지문덕과 의협심을 가진 장보고(張保皐)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중국의 서적들이 없었다면 이 사적들이 없어져서 후세에는 알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은 김유신전에 이어 ‘열전’의 두 번째 인물로 을지문덕전을 넣었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본기’ 영양왕조의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기사와 거의 비슷하다.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전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을지문덕의 집안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성격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와 재주가 있었고 겸해 글을 지을 줄 알았다.-

 

   그리고 끝부분에 가서는 저자의 평으로 이런 말을 달아놓았다.

  -수 양제(隋煬帝)의 요동전쟁은 군사를 출동시킨 규모에 있어서 전고에 없이 굉장했건만 고구려는 한 모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로서 그를 맞아서 자기 국토를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거의 다 없애버린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인재가 없으면 어찌 나라 노릇을 할 수 있으랴(<춘추좌전>)’ 했으니 과연 그렇다.-

 

  그러면 비록 역사의 기록은 부족하지만 이제부터 수나라 백만대군을 무찔러 고구려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불세출의 명장 을지문덕의 일생을 더듬어보기로 한다.

 

  살수대첩은 영양왕 23년(612년)에 일어났다. 그 당시 을지문덕이 50대라면 그는 평원왕(平原王 : 平崗王) 2년(560년)쯤 태어났고, 만일 60대였다면 양원왕(陽原王) 11년(550년)께에 태어난 것으로 역산된다.

  을지문덕 장군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평원왕이나 양원왕 재위시에 평양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증산군ㆍ평원군 지방에 을지문덕 장군에 관한 전설이 아직도 전해져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도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石多山, 평안도 증산현 서북쪽에 위치) 사람으로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꿈에 삼신(三神)을 뵙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해마다 3월 16일이 되면 말을 타고 마리산(摩利山)으로 달려가서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왔으며, 10월 초사흘이 되면 백두산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었다.

 

  홍무(洪武) 23년에 수나라 군사 130만여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기묘한 계책을 내어 병사를 출동하여 그들을 멸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드디어 크게 쳐부수었다. 수나라 수군과 육군이 함께 무너져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천 700명 정도였다.

  양광(楊廣 : 수 양제)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을지문덕이 허락하지 않고 영양무원호태열제(?陽武元好太烈帝) 또한 추격을 엄명했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는데, 한 갈래 군사는 현도 방면에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 방면에서 유주에 이르러 그 주ㆍ현으로 들어가 그들을 다스리는 한편, 그 유민들을 불러서 안정시켰다. (중략) 양광은 임신년에 고구려를 침범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병 준비를 했다. 우리 조의군(?衣軍) 20만으로 양광의 군사들을 거의 모두 멸했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 공 같은 이는 곧 만고에 한 시대를 창출한 거룩한 호걸이로다.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조선 개국공신)이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더불어 백상루(百祥樓, 평북 안주 북성)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살수 질펀하게 흘러 푸른 하늘 울렁이는데

   수나라 군사 백만 명을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냈네

   지금까지 어부와 나무꾼의 말에 남아 있으니

   나그네의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네.-


 

  그러면 이제부터는 평양 인근의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을 소개한다.

 

  그가 태어났다는 마을의 석다산은 현재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270m이다. 석다리에는 을지문덕이 어린 시절 글 읽고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 불곡산 동굴 속에서 글 읽고, 석다산 남쪽의 마리산(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도 잇다.

  어느 날 을지문덕이 불곡산 석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들어왔다. 잠결에 괴이한 살기를 느낀 을지문덕이 눈을 뜨면서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 구렁이의 목을 쳤다. 그때 칼로 내려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 모서리가 떨어져나갔다. 지금도 그 석굴에는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돌책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한편 평안남도 평원군 운봉리의 대원산에도 을지문덕 장군의 전설이 있다. 을지문덕이 무술 훈련을 하면서 활을 쏘는데 과녁이 잘 보이지 않기에 높이 자란 나무들을 칼로 쳐서 시야가 훤히 트이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나무들은 을지문덕이 칼질을 한 그 높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평양시 대성산 기슭에도 이런 전설이 이어져내려오고 있으니, 이른바 유명한 사슴발 여인 전설이다.

  고구려에 사슴발 모양을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한꺼번에 여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들들의 발도 모두 사슴발 모양이었다. 어느 날 길 가던 어떤 사람이 아이들을 보더니 그 어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들이 오래 살려면 멀리 떠나보내야만 하오.” 사슴발 여인은 아이들이 일찍 죽는다는 바람에 큰 나무통에 아이들을 넣어 대동강에 띄워보냈다. 그 나무통은 서해로 떠내려가 바다를 건너 중국의 동해안에 닿았다. 아이들은 거기에서 자라서 모두 장수가 되어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범할 때 그들도 출전했다.

  고구려에서는 적장 가운데 사슴발을 가진 형제 장수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슴발 부인은 그들이 자신의 아들이란 사실을 직감하고 을지문덕 장군에게 찾아가 자신이 적진에 들어가 아들들을 타이르겠다고 청했다. 사슴발부인은 적진에 들어가 사슴발 장수들을 만났다.

  “얘들아. 내가 너희 어미란다. 너희가 어미의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란다. 자, 내 발을 보아라.”

  그래도 그들은 부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앗다. 그러자 부인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꺼내 짜니 젖줄기가 여러 갈래로 뿜어져나와 장수들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제서야 친어머니를 알아본 사슴발 장수들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고구려 진영으로 넘어와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고구려와 중국의 사정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시 영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영양왕은 평원왕의 맏아들로서 평원왕 7년(56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재위 32년 만인 590년에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즉위조에 따르면, ‘왕은 풍채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고 했다. 이 영양왕이 바로 유명한 평강공주(平崗公主)의 오라비요,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평강공주의 남편이 되고 고구려의 용장으로 변신한 온달(溫達) 장군의 매부가 된다.

  영양왕은 즉위하자 중국을 재통일하여 새로운 강적으로 떠오른 수나라와 무모한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여세를 몰아 팽창정책을 펼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언젠가는 고구려에도 침략의 마수를 뻗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나라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기를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영양왕은 즉위 이듬해인 591년 정월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즉위 사실을 알리고, 재위 3년 정월, 8년 5월에도 각각 사신을 수나라로 보내는 등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것은 영양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인 589년이었다. 중국은 577년에 북주의 우문옹이 북제를 멸망시켜 북방을 통일했지만, 외척인 양견(楊堅)이 정권을 장악한 뒤 581년에 왕을 내쫓고 수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수 문제(隋文帝)이다. 양견은 589년에 남쪽의 진나라까지 멸망시킴으로써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이 같은 수의 등장은 동북아시아 국제 정치 질서에도 당장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고구려는 북주와 북제와 등거리 외교관계를 통해 될 수 있는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고, 백제 또한 북주와 북제와의 외교관계를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었는데, 남북조시대가 무너지고 수나라가 등장하니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재빨리 수나라 건국 직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신라도 이에 뒤질세라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신라는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611년에 고구려정벌을 청하는 이른바 ‘걸사표(乞師表)’를 보내기도 했고, 백제는 수나라의 2차 침공 직전에 고구려정복의 향도 노릇을 자청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수 문제는 중국 통일 이듬해인 590년, 즉 평원왕 재위 마지막 해에 고구려에 선전포고와 마찬가지인 국서를 보내 자신에게 복속할 것을 1차로 경고한 적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막 즉위한 영양왕이 수나라와의 대결은 잠시 피하고자 사신을 보내 외교교섭을 모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이었다.


  선제공격을 개시한 것이 고구려였다. 영양왕은 재위 9년(598년)에 1만 명의 말갈병을 친히 거느리고 요서지방의 공격을 단행했다. 이는 거란과 말갈 여러 부족의 지배권을 확보해 요서와 요동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격노한 수 문제는 그해 6월에 즉각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정벌을 명령했다. 마침내 제1차 고ㆍ수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수 문제의 명령을 받은 그의 넷째아들 한왕(韓王) 양량(楊諒)과 원수 왕세적(王世積)은 육군을 이끌고 임유관을 지나 요동으로 진격했으나 홍수와 군량보급의 두절에 질병까지 돌아 대부분의 군사가 죽었다. 한편 주라후(周羅喉)가 이끈 수나라 수군도 동래를 출발해 평양으로 향하다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숱한 군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해 9월에 3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불과 1, 2만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수나라의 제1차 고구려원정은 참패로 끝났는데, 위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조의 내용은 <수서>의 기록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그 실상이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단재는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는 <서곽잡록>과 <대동운해>라는 책을 인용해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썼다.

  -영양대왕이 수 문제의 모욕적인 글을 받고 대로하여 군신에게 묻자, 강이식(姜以式)이 “이 같은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함이 가하다”고 적을 칠 것을 주장, 대왕이 이를 기꺼이 좇아 병마원수로 삼아 5만 정병으로 임유관으로 보내고, 먼저 예(濊)의 병력 1만으로 요서를 침공, 수나라 군사를 유인하고, 거란병 수천으로 바다 건너 산동반도를 공격하여 1차 고ㆍ수 전쟁이 개시되었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이때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원수는 진주 강씨 시조인 강이식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 심양현 원수림에 있다고 전한다.

  수나라의 1차 침공을 대승으로 마무리한 고구려는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번에는 남쪽 후방의 우환거리인 신라와 백제 응징에 나섰다. 또 다시 수나라가 침략해올 경우 배후에서 있을지도 모를 공격을 미리 차단해놓기 위해서였다.


  영양왕은 전쟁 2년 뒤인 재위 11년(600년) 정월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모색하는 한편, 태학박사 이문진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역사서를 5권으로 간추린 <신집>을 편찬하게 했다. 지금은 실전되었지만 이 <신집>에는 틀림없이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빛나는 사실이 실려 있었을 것이고, 이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양왕은 재위 14년(603년)에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주를 치게 하고, 18년(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해 포로 3천 명을 잡아왔으며, 다시 그 이듬해에는 신라를 공격하여 포로 8천 명을 잡아와 모두 고구려 지역에 배치함으로써 혹시 있을지도 모를 신라와 백제의 북진을 미리 차단했다.

  그런데, 그 동안 수나라에서는 정변이 있었다. 604년 7월에 수 문제의 둘째아들 양광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여 수 양제로 등극했던 것이다. ‘제2의 시황제(始皇帝)’ 소리를 들은 수 양제는 즉위하자 낙양에서 오늘의 북경인 탁군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아비 때 실패한 고구려원정의 기회를 노렸다.

  610년부터 본격적인 고구려원정의 준비에 들어간 수 양제는 611년 2월에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612년 정월에 마침내 고구려원정에 나섰다. <수서>는 이때 수 양제가 동원한 군사가 24군에 113만 3천 800명이라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군량 등 물자 수송에는 그 2배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이는 거의 300만에 이르는, 중국 역사상, 아니 세계 전쟁사에서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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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에 요하에 이른 수나라 대군은 부교를 가설하여 요하를 건너려고 했으나 고구려군과의 첫 접전에서 역전의 용장이라는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이 전사함으로써 초전부터 여지없이 사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요하를 건넌 수군은 요동성을 포위했다. 당시 요동성주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군사와 백성은 용감히 싸워 성을 잘도 지켜냈다. 6월이 될 때까지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 하자 수 양제는 자신이 직접 요동성으로 달려와 독전을 했으나 그래도 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초조해진 수 양제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장수인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30만 5천 명의 정예군을 주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토록 명령했다.

  한편 내호아(來護兒)와 주법상(周法尙)이 이끈 수나라 해군은 황해를 건너 대동강 입구에서 고구려의 방어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들 수군은 평양을 공격하는 우문술ㆍ우중문의 대군과 합류하여 그들에게 군량과 무기를 보급하기 위해 해로로 평양을 공격한 것이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내호아의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까지 단숨에 이르렀으나 성은 텅 비어 있었다. 이는 평양 방어군 총사령관인 고건무(高建武)의 탁월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건무는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서 뒷날 영류왕(榮留王)으로 즉위한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허겁지겁 평양성으로 난입했는데, 이때 성 밖에 매복하고 있던 고구려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내호아는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도망칠 수 있었다.

 

  수 양제의 특명을 받은 우문술과 우중문은 요동성을 우회하여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습작전을 펼쳐야 할 군사들이 모두 100일분의 식량과 무기를 지니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진격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는 엄명을 내려도 너무 무거워서 몰래 땅에 파묻는 자가 많아 군량이 이내 떨어져 버렸다.

 

  고구려의 대신이요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이 우문술과 우중문의 수나라 본영에 나타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삼국사기>, 사실은 <수서>의 기록이지만 사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을지문덕 장군은 적진으로 찾아들어가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항복하겠노라는 뜻을 전했다. 사실은 항복이란 거짓이고, 항복한다는 핑계로 적군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다. 우중문은 출전에 앞서 수 양제로부터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기에 을지문덕이 제 발로 걸어서 찾아오자 이게 웬 떡이냐면서 속으로 기뻐하며 을지문덕을 붙잡아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위무사로 종군한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적장을 생포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고, 또 대국의 체면도 말이 아니라면서 한사코 반대했다. 우중문은 할수없이 을지문덕을 돌려보냈다. 물론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와서 항복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놓아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낸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듯했다. 나중에 황제가 이 일을 알면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곧 을지문덕에게 사람을 보내, “꼭 할 말이 더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난 을지문덕이 그런 잔꾀에 넘어갈 리가 만무여서 돌아보지도 않고 금세 압록강을 건너가 버렸다. 다 잡은 적장,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을지문덕을 놓쳐버린 우문술과 우중문은 속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군량마자 동이 나 버렸다. 우문술은 퇴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우중문과 의논하니 우중문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장군은 수십 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하찮은 적군을 쳐부수지 못 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뵙겠소이까?”

  우중문이 황제까지 들먹이며 나서자 우문술도 할수없이 그의 주장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을지문덕의 뒤를 쫓았다. 돌이켜보건대 을지문덕 장군이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또 적의 침략군과 맞선 최고사령관의 신분이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들어간 용기 희생정신이야 말로 참으로 자손만대에 길이 빛날 민족적 영웅의 풍모라 하겠다.

 

  당시 고구려는 을지문덕 장군의 작전 계획에 따라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사하고 있었다. 청야전술이란 성 밖에 집이건 밭이건 모두 비워놓아 적군에게 곡식 한 톨 돌아가지 않게 하는 계책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도록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일부러 져줌으로써 적군을 고구려 영토 더욱 깊숙이 유인했다. 수군은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다랐다.

 

  을지문덕 장군이 다시 사자를 적진에 보내 이런 말로 거짓으로 항복을 청했다.

   “만약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우리 대왕을 모시고 가서 황제에게 항복하리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들을 조롱하는 저 유명한 오언시를 지어 보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방략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리.-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그제서야 비로소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을 알아차린 우문술 등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곳곳에 매복해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이들 지친 수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추격하며 맹렬히 공격했다.

  수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오늘의 청천강으로 알려진 살수에서였다. 여기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등 수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전설에는 을지문덕 장군이 상류를 막았다가 적군이 반쯤 건넜을 때 둑을 터뜨려 수장(水葬)을 시켰다고 했으나 이는 전술적으로 무리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곳곳에서 매복에 걸려 계속 패퇴하다가 주력군의 대부분이 살수에서 전멸당하다시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압록강을 살아서 건너간 자는 30만 5천 명 가운데 2천 700명뿐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살수대첩의 전말이다. 우문술의 패전 소식을 들은 내호아도 남은 배를 끌고 퇴각해버렸다. 보고를 받은 수 양제는 패전 책임을 물어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돌아가고 말았다. 귀국한 수 양제는 우문술을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을지문덕을 놓아보낸 죄를 물어 유사룡은 목을 쳤다.


  한편, 그 옛날 살수였던 청천강이 흐르는 평안도 안주 땅에는 살수대첩에 얽힌 이런 칠불사의 설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살수싸움이 있기 전에 일곱 명의 고구려 병사가 스님으로 변장하고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가에서 이 광경을 본 수나라 군사들이 그곳 여울이 얕은 줄 알고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고 아우성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상류에서 큰물이 쏟아져내리고, 사방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몰려나와 활을 쏘고 투석을 하며 수나랄 군사를 무찔렀다. 그 뒤 고구려에서는 부처님의 가호로 수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면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칠불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때 스님으로 변장한 일곱 명은 고구려 병사가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었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으로 자처하던 수 양제는 부자 2대에 걸쳐 소국인 고구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이를 갈며 분통해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612년 4월에 또 다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다시 고구려정복에 나섰다. 이것이 제3차 침범이었다. 수 양제는 평민으로 강등시켰던 우문술을 다시 등용하여 대장군으로 삼아 선봉을 맡게 하여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하고, 왕인공(王仁恭)에게는 신성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친히 요동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이번에도 철벽같은 수성전을 펼치는 한편,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청야전술을 펼쳐 수나라 군사들의 진을 빼놓았다.

  수나라 군사들은 성벽보다 높은 누각인 비루당(飛樓?), 성벽을 넘기 위한 높은 사다리인 은제(雲梯), 성벽을 부수는 충제(衝梯) 따위의 공성기를 동원하여 맹렬히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성은 20일이 넘도록 함락당하지 않았다. 수 양제는 100만 개의 흙 포대를 성벽 높이로 쌓아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성을 공격토록 하는 한편, 성벽보다 더 높은 8층 수레로 성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그래도 고구려 군사들은 무서운 투지로 용감하게 싸워 단 한 명의 수나라 군사도 성안으로 넘어오지 못 하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 양제에게 급보가 날아왔다. 후방에서 군량 수송의  총책임을 지고 있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였다. 수 양제는 급히 회군, 양현감의 반란부터 진압했다.

  3차에 걸친 고구려정벌이 그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수 양제는 이듬해인 614년 2월에 또 다시 전국적인 총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소집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해 7월에 제4차 출병을 단행했으나 소득이라고는 수군 장수 내호아가 고구려의 비사성을 탈취한 것밖에는 없었다. 전쟁은 지지부진해지고 공격하는 수나라나 방어하는 고구려나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양국은 화친책을 모색하고, 이에 따라 수 양제는 다시 군사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장장 16년 동안 4차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은 그렇게 끝났는데,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전처럼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무리한 고구려원정으로 수나라의 국력은 피폐해지고 백성의 삶이 곤궁해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쉴새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611년에 시작된 농민들의 봉기가 해가 갈수록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여기에 호족과 귀족들까지 군웅할거함에 따라 수나라조정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617년에 마침내 수 양제가 친위군의 쿠데타로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 양제를 죽인 사람은 그의 평생 동지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다. 수 양제의 피살로 수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연(李淵)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당나라이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고구려에서도 영양왕이 재위 29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이복동생 건무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류왕이다. 


  그런데 첫머리에서도 사료의 빈약함을 탄식한 바 있지만,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612년의 살수대첩 이전부터 수나라에도 알려질 만큼 뛰어난 인물로서 출장입상(出將入相)했던 고구려의 대신이요 전쟁영웅인 을지문덕의 자취가 그 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을지문덕의 공로 덕분에 고구려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뒤에 쳐들어온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 거국적 사기와 저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동사강목>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싸움으로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여겨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 하게 되었으니 이는 을지문덕의 공로다.-

  또 조선조 세조 때인 1458년에 양성지(梁誠之)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를 추천했는데, 고구려에서는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과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이 천거되었다. 그리고 숙종도 1680년에 관리를 보내 을지문덕의 사당에 현판을 다시 만들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에 의병들의 군가 ‘용진가’에도 다음과 같이 을지문덕이 나온다.

 

  -한산도에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 백만 몰살하오신

   이순신과 을지 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 쳐보세.-


   단재 신채호도 <을지문덕전>에서 이렇게 일면 찬탄하고 일면 아쉬워했다.

  -살수의 전투는 한 나라의 흥망의 기틀이었다. 을지문덕이 싸우려 하면 전 국민이 모두 싸웠으며, 을지문덕이 물러가려 하면 전 국민이 다 물러가고, 을지문덕이 속임수로 항복하여도 상하가 그 속임수 항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임금의 신용에 오로지함과 국민의 신뢰가 이와 같이 깊었으니 그야말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내정을 잘 다스리고 외적을 물리치는 정책을 강화하여 일국의 안정과 위험이 그 한몸에 매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거늘 후세 사람이 역사에 남은 몇 줄 글에만 집착하여 을지문덕이 다만 살수의 한 번 전투에 하늘의 천사처럼 한 조각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는 바람이 이는 채찍으로 번개같은 말을 쳐서 갑자기 멀리 사라져 그 전에도 을지문덕이 없고, 그 후에도 을지문덕이 없었다고 한다. (중략) 영양왕 서쪽 정벌 이후 살수전 이전의 일은 모두 을지문덕에 속함은 의심할 바가 없다.-

 

  참으로 그렇다. 돌이켜보건대 을지문덕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수나라에 멸망당했을 지도 모르고,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제2의 시황제’ 수 양제에 의해 신라와 백제도 무사하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뒷날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멸망당하고, 어쩌면 명나라도 무사하지 못 했을 것과 같다고 하겠다.

 

 

==황원갑 저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인디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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