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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대한민국의 친일경찰 경찰조직 장악 (프랑스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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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벌

1944년에 연합군이 독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낸 후, 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나치 협력자 처단을 위한 훈령을 발표, 이에 나치에 조금이라도 협조했던 100만명 가량의 프랑스 인이 체포 구금됨. 이중 6,763명에게 사형선고를, 26,529명에게 유기 징역형을 내렸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처형된 숫자이며 비공식집계로는 즉결처분이나 약식재판을 통해 처형된 사람이 무려 12만명에 달한다는 설, 1만여 명에게는 강제노역, 약 3천명에게는 중노동 무기형)

당시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수장인 페탱을 포함한 3부 요인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패탱은 감옥에서 자살합니다.    사회적 지배층이었던 정치, 언론, 작가, 시인, 예술가, 기업가, 종교인 등등 공적권한을 가진 자들에게는 상당한 중형이 선고됐다. 


▶ 언론인 처벌 사례 몇가지

- 일간 '오주르디'의 편집인 쉬아레즈
   :
"우리의 땅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독일인" ,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  →  총살, 재산몰수

- 일간 '누보 땅'의 발행인 쟌 뤼세르 ( 신문협회의 회장) → 사형, 재산몰수

-수필가 겸 문학비평가 브라질라쉬
  :
"프랑스 노동자는 독일전쟁에 마땅히 파견되야 한다", 독일의 침략을 찬양 → 사형

- '르 마뗑'지의 논설위원 스테판 로잔느 :
독일찬양 사설 집필 → 20년의 독방구금, 재산몰수

특히, 이중 9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 이라는 특이한 선고를 내렸는데 이는
시민권 박탈 및 사회적 매장 조치로 이 선고를 받은 사람은 프랑스 내에서 선거권, 공직진출 자격, 무기 소유권등을 가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2차 대전 중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사는
국유화 조치, 그 사주와 경영진은 법적 처벌을 받았다. 당시 처벌을 받지 않은 신문사는 르 피가로를 비롯해 3개사 밖에 없었다.
( 이들 3개신문사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마자 자진 휴간해 버렸다)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색출 및 처벌은 40년 간 계속 된다.   이는 1964년 통과된 '전쟁 범죄에 관한 시효제거를 규정한 법률'에 의한 것으로, 반민족, 반인륜 범죄에 대한 시효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을 지라도, 또 다시 민족 반역자가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드골이 장담을 할 정도로, 프랑스의 반역자 대숙청은 나치 협력자의 세력이 다신 재기 할 수 없도록 완전 궤멸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다른 유럽 지역도 마찬가지 였다.
반역 행위로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10만 명당 프랑스 94명, 벨기에 596명,  네덜란드 419명, 노르웨이 633명 이었다.    특히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는 소급입법을 만들어 기소하고, 폐지시켰던 사형제도까지 부활시켜 처단하였다.

해방 후 프랑스의 정치무대에서는 민족반역자나 나치 협력자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는 민족정기와 정통성이 살아 넘치는 참신하고 민주적이며 깨끗한 정치인과 언론인들로 완전히 교체됐다.

한국 정치로 말하자면 항일독립투사들로 메웠고 친일민족배반자들은 처벌을 받거나 피선거권, 공직자 진출권을 박탈해 버려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게 했다.



Ⅱ. 해방 후 친일 경력을 가진 경찰의 경찰조직 장악

대한민국의 해방 후 모습은 경찰의 사례로 대신한다.

1946년 11월 현재
총감 ( 총1명 중에 1명이 친일경찰 출신) -> 친일경찰비율 100%
관구장 ( 총8명 중에 5명이 친일경찰 출신) -> 친일경찰비율 63%
도경국장 ( 총10명 중에 8명이 친일경찰 출신) -> 친일경찰비율 80%
총경 ( 총30명 중에 25명이 친일경찰 출신) -> 친일경찰비율 83%
경감 (총139명 중에 104명이 친일경찰 출신) -> 친일경찰비율 75%
경사 (총969명 중에 806명이 친일경찰 출신) -> 친일경찰비율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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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부터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일제시대때 민족을 팔아먹고 그 댓가로 일제의 그늘에서 호위호식했던 집단에 대하여 해방후 정리하지 못했던 것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분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들은 반공이란 이데올로기로 사라지는 비극의 시작이 된다.


Ⅲ. 마무리 글

얼마전 KBS에서 해방815 특집방송을 하면서 친일 후손과는 인터뷰를 하는데 별 문제가 없는데 항일운동을 했던 후손과는 인터뷰 일정을 잡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일후손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기 싫다고 해도 기다리고 있으면 인터뷰가 성사되지만 대표적인 항일 운동을 했던 자손들의 경우 기본적인 생계도 어려운 경우가 많고 대체적으로 기자들을 만나기를 꺼려한다고 한다.   아마도 국가와 사회에 대한 배신감이 깊기 때문일게다.

방송 마지막 멘트가 인상적이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 가족과 모든 재산을 바쳤는데 이와같이 아무 보상이 없다면 그 누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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