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꺼리

사해사본이 나오기까지 (1)

반응형


쿰란 사해 사본이 나오기 까지, 첫번째 이야기
전 세계를 2천년의 잠에서 깨운 1947년의 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학생이라면, 아니 이제는 일반인들에게 까지도 누구나 쿰란 이라는 이름은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해 북쪽에 있는 지역의 이름이지만, 일반적으로 쿰란 사본, 사해 사본등으로 그곳에서 아주 오래된 성서가 발견된 것 쯤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쿰란의 이름은 이제 전세계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충 개론적으로 알고 있는 쿰란의 이야기이지만 쿰란의 중요성만큼 우리는 쿰란에 대한 이야기, 그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다.

실제로 쿰란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서방세계에서는 막대한 연구비가 투자되고 있고, 그와 함께 아직도 매우 활발하게 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쿰란은 우리에겐 먼 옛날 이야기 처럼 들리는지도 모른다.

쿰란에서 나온 수많은 자료들은 무엇보다도 성서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결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또한 쿰란 공동체 연구는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중간기와 함께 예수 시대, 그리고 그 다음 초대 교회 시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당시 시대상을 밝혀 주기 때문에 쿰란 연구는 매우 중요하게 그리고 좀 더 자세히 신학교와 학계에서 다루어 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이 쿰란 이라는 이름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야기 부터 들려 주고자 한다. 아주 흥미 진진한 이야기들을...

──────────────────────────────────────────────────────────

 쿰란이 전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은 1947년 초 한 베두인 아랍계 청년 Muhammed edh-Dhib에 의해서였다. 흔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양들을 치던 목동 무함메드가 잃은 양을 찾고 있었는데, 한 벼랑위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한다. 그는 자기의 잃은 양을 찾으려고 내려가기 앞서, 우선 혹시나 사나운 짐승들이 있지나 않나 싶어서 그들을 쫒기 위해 돌을 던져본다. 그러자 그는 안에서 무언가 쨍그렁 하고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무하메드가 조심히 그 아래로 내려가 보니 깨진 항아리 조각들과 함께 양피지위에 무언가 옛 날 글씨들로 빼곡하게 쓰여져 있는 낡아빠진 두루마리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2천년 이상 숨겨져 있던 언청난 보물이 세상으로 나오게 된 그 첫 사건이다. 또는 무하메드가 금광을 찾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곳이 쿰란 연구의 시작이 된 바로 쿰란 제1번 동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전에 이스라엘에 혼자 배낭을 메고 갔을때, 이곳 쿰란 공동체 집터에 갔었다. 오늘 날 관광객들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쿰란 공동체 집터에서 건너편으로 마주 보이는 곳이 4번동굴이고 그 오른쪽으로 가면 5번 동굴이 있고, 4번 동굴 멀리 뒤쪽 산지에 보이는 굴이 바로 6번 동굴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에게 들려 주는 안내원들은 바로 이 4번 동굴을 바라보면서 처음 베두인 소년이 돌을 던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내원의 설명이 끝나자 관광객들중 짖꿎은 몇이 건너편 동굴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아주 몰상식한 미국인들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말렸다. 그리고 이것은 4번 동굴이고 그 베두인 청년이 돌을 던졌다고 하는 곳은 여기서 북쪽으로 한참 더 떨어져 있는 제1번동굴이라고 가리켜 주었다.

하여간, 무하메드는 이것을 갖고 베들레헴 장터에 갔다가 거기서 구두수선공인 '칸도'(원래 이름은 Kahil Iskander Shahin이지만 '칸도' 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를 만난다. 칸도는 가죽 신발들의 끈들을 꿰메어 주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당시 그는 골동품 중개상으로 일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칸도는 그것을 자신이 속해있던 시리아 정교회 소속 예루살렘의 성 마가 수도원 당시 감독 이었던 사무엘(Athanasisus Yeshue Sammuel)에게 가져갔다. 그는 이것이 시리아 문서인줄로 알았다. 사무엘 대주교는 한 부분을 불로 태우자 그 모양이 오그라드는 것을 보고서 이것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음으로 이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이며, 그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 시내반도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에 학자겸 주교로 가 있던 영국인 알렉산더(Boyd Alexander)와 함께 조각 하나를 찢어 두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았다. 금방 부스러지고 말았다.
 그는 이것이 당시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돼 있던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믿었다. 사무엘 대주교는 이것이 옛 시리아 문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것의 가치가 얼마나 클 것인지에 흥분해 있었다. 그는 당장 칸도를 불러 나머지 모두를 찾아보라고 지시한다. 사무엘 대주교는 초조하게 칸도와 베두인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나타나질 않았다. 어느날 수도원으로 몇 명의 베두인들이 찾아왔을 때, 수도원에 있던 주교 푀트너(Pförtner)는 그들을 매몰차게 밖으로 내 보내고 만다. 그들은 거지 차림이었기에 수도원안으로 들어 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하게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무엘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칸도와 함께 이들을 찾아나선다. 그런데 이미 그 사이에 이 베두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나머지 3개의 두루마리들을 다른 골동품상에게 벌써 팔고 난 뒤였다.
 1947년 7월 다행히 칸도는 이 3 두루마리를 찾게 되고 사무엘 주교를 위해 약 250 달러를 주고 구입한다. 사무엘은 칸도에게 그 중 3분의 1을 수고비로 준다. 그리고 6년 뒤에 이스라엘 정부에게 250,000 달러에 팔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지기는 이것을 처음 발견하고 팔었던 무하메드는 그 돈으로 사냥감 총 한자루와 자기 부인을 샀더랜다....

처음에 학자들은 이것의 연대를 기껏해야 중세때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미 1920년대 필레스틴에 고고학 작업들이 있었고, 곳곳에서 암시장들을 통해 거래되던 옛 문서들이 있었지만, 모두 그리 오래된 것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쿰란에서 나온 이것도 역시 그런 모조품정도의 하나일 거라고 여겼다.

1948년 2월 사무엘은 당시 고대근동 미국연구원(오늘날 올 브라이트 연구소로 불림) 성서학자인 트레버(John C. Trever) 박사를 부른다. 트레버 박사는 이것이 놀라울 정도로 오래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트레버 박사는 그 7,34미터의 두루마리를 보고서 기원전 1-2세기의 이사야 사본이라고 알아맞췄다. 54쪽으로 된 1장에서 66장까지 전부 다 들어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진 그 어떤 히브리 사본의 연대보다 1000년 이상을 앞댕기는 순간이었다. 1990년, 94년에 실시된 방사능 연대 측정실험은 이를 기원 전 2세기 것으로 결정했다. 트레버 박사는 사무엘의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중 두 장을 윌리암 올브라이트 교수에게 보낸다. 1948년 3월 8일 올브라이트 교수는 트레버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금세기 최대 사본발견에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무슨 믿기지 않는 발견이란 말인가요....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품이 틀림없소...."
 사무엘 정교회 감독과 칸도뿐 아니라 이미 이 소식을 알게된 이들이 있었다. 요르단의 문화재관리위와 그 밖에 도굴단들이었다.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쿰란에 대한 발표는 발견된지 1년 뒤인 1948년 4월 12일 당시 문화재관리위원장이었던 하딩 장군이었다. 아직 이스라엘이 독립되기 이전이었고, 처음으로 다시 그 동굴을 찾게 된 것은 1949년 1월 말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원래 동굴입구 아래쪽으로 그 보다도 훨씬 큰 입구가 이미 뚤려 있었다. 도굴단들이 벌써 다녀갔던 것이다. 최소한 이곳엔 56개의 항아리들과 대략 80개의 두루마리들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 사라지고 그곳에서 단지 70개의 조각들만을 주워 돌아온다.
 하딩장군은 당시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현재는 록펠로 박물관)총무였던 요셉 사드(Joseph Saad)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 둘은 끊임없이 예루살렘 구시가에 있던 성 마가 수도원에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미 그 사이 사무엘 주교는 수도원 누구도 몰래 자기의 두루마리들을 갖고 미국으로 뜨고 없었다. 어느 날 하딩과 사드가 여느때와 같이 수도원에 갔을 때, 길 건너편에서 한 여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말하기를 그녀 남편이 일년전 사해 근처 한 동굴에서 일할 때, 거기서 옛날 골동품들을 찾았는데, 누구도 살려고 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여기 수도원에서 이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까 해소 왔노라는 것이었다. 하딩과 사드는 눈이 둥그래져 서로를 쳐다 보았다. 즉시로 그들은 그녀의 남편을 데리고 박물관 지하로 갔다. 지하실 책상위엔 발굴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그 남자는 순순히 자백을 했고, 갑자기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담배쌈지가 어찌된건지 지금 박물관 지하 책상위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도굴시 동굴에 떨어졌다가 발국팀들이 주워왔던 것이었다.
 그 남자로부터 모든 배후에 칸도가 있다는걸 알았다. 그러나 칸도를 찾아 나선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칸도가 있는 베들레헴은 1949년 당시 요르단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들레헴은 현재 요르단 서안지구에 속해 있지만 6일전쟁이후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이스라엘의 손안에 쥐어지게 된다.
우여곡절끝에 베들레헴에 온 사드가 칸도를 만나게 될때의 일들은 참으로 목숨을 건 일이었기도 했다. 결국 사드는 칸도의 환심을 사게 되고 드디어 칸도는 예루살렘 박물관까지 오게 된다. 물론 아직까지 동굴의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못한다. 잘못하다간 칸도는 물론이고 그 엄청난 보물들이 어디론가 꼭 꼭 숨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칸도가 드디어 사드에게 자신의 가죽 지갑을 보여준다. 거기엔 손가락 크기의 무언가 적혀 있는 작은 가죽조각 몇이 들어 있었다. 칸도가 이를 팔려는 눈치를 보인다. 그리고 칸도는 다시 돌아간다. 사드는 자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절대 실수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칸도가 돌아가자 마자 사드는 이 사실을 박물관 관장인 하딩장군에게 알린다. 며칠이 지나 칸도가 다시 사드에게 왔을때, 누굴위해 사려고 하느냐고 사드에게 묻는다, 잠시 예루살렘을 방문중인 한 영국인 교수라고 사드는 얼버부린다. 그리고 그 영국인이 나머지 모두를 다 사고자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여리고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칸도는 반드시 그 영국인이 나와야 한다고 단서를 단다. 칸도가 가자 사드는 무작정 아무 영국인 하나를 우선 찾는 일이 급해진다. 물론 그 방면에 전문가같은 행세도 부려야 할 사람이었다. 다행히 박물관에 한 영국인 직원이 쑈를 하기로 하고 그들은 여리고에 있던 다 쓰러져가는 한 호텔로 향한다. 사드는 칸도에게 그 영국인 가짜 교수를 통해 요르단 돈으로 800 파운드, 약 2300 달러까지 지불하겠다고 말한다. 하딩이 사드에게 지시했던 거였다. 다 낡아빠지고 너덜너덜한 쪼가리들한테 그동안 값이 엄청나게 뛰어 오른건 이미 라디오를 통해 바로 미국에 와 있던 사무엘 감독이 자신의 두루마리를 25만달러에 팔려고 한다는 방송이 나간 뒤였다. 칸도가 갖고 온 조각들을 대충 깔아 놓으니 약 1.25m2정도 펼쳐졌다. 서로간에 흥정이 오고 갔고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온 칸도에게 사드는 결국 요르단 돈으로 200파운드를 얹어 1000 요르단 파운드를 건네준다. 무엇이 되었든지 비록 다 낡아빠지고 너덜너덜한 조각들이지만 더이상 무지한 이들 손에서 더 헤어지도록 할 수는 없었다. 뒤돌아 나가는 칸도에게 사드는 한마디 던진다. "참, 하딩씨가 안부 인사를 전하시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편, 1947년 11월 23일 당시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였던 수케닉 교수는 골동품 수집인이었던 아르메니아인 친구 오한(Levon Ohan)으로부터 급한 전화 한통을 받는다. 오한은 전화로는 말할 수 없지만 친구의 조언을 구한다는 급한 목소리를 남긴다. 수케닉은 급하게 친구에게 달려 가려 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선 특별 통행증이 필요했다. 친구는 아랍진영이었고, 자신은 유대지구에 살고 있었다. 당장 통행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둘은 다음날 아침 경계 철조망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다음 날 아침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만난 두 친구간엔 낡은 두루마리 조각 하나가 전해진다. 옛 히브리어가 양피지위에 쓰여져 있는 것을 본 수케닉은 자신의 눈을 의아해 한다. 이런 것은 평생 듣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친구 오한은 그것을 아랍 베두인들로부터 얻었으며 그런게 베들레헴에 아직 더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수케닉에게 전한다. 수케닉은 오한에게 빨리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 나머지 것들 모두를 구입하라고 급하게 전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은 이 조각을 더 살펴보고 통행증을 구해 보겠노라고 하고 헤어진다.  11월 27일 드디어 친구로부터 전화가 온다. 오한을 만난 수케닉은 이 모두가 진품이라는 것과 함께 당장 내일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당시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아랍인 버스를 타고 가야하고 유대인들에게 이는 위험 천만스런 일이었다. 수케닉의 부인이 무릎을 꿇고 말린다. 다음 날 저녁까지 발만 구르던 수케닉의 집으로 당시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무장 조직이었던 하가나 총지휘자이며 훗날 군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된 그의 아들 이가엘 야딘이 들어온다.이가엘 야딘은 훗날 아버지 수케닉 교수보다 더 유명한 고고학자가 되고, 그에 의해 텔 하쪼르(개역 성서엔 하솔 이라는 지명으로 나옴)와 마사다가 발굴된다. 텔아비브에 본부를 둔 하가나에서 이제 곧 예루살렘 탈환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 사전 정찰을 나온 야딘은 아버지 서재에 들어갔다가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희귀한 옛 문서 조각들을 보게 된다. 이를 본 수케닉은 아들에게 묻는다. "이가엘,... 내가 베들레헴에 갈 수 있겠니?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할텐데 말이다.. 그것도 당장 내일 아침에..... 뭐라고 말 좀 해보아라"


출처 : 쿰란연구

반응형

'생각꺼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해사본이 나오기까지 (2)  (0) 2008.05.26
운수노조 - 광우병 소고기 절대 운송않겠다  (0) 2008.05.25
중동전쟁  (0) 2008.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