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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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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의 배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분쟁은 유태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성서를 근거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립하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13세기경, 유태인들은 모세의 지도에 이집트에서 나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 것과 비슷한 시기에 남부의 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하고 양 민족간에 영토 분쟁이 시작된다.   필리스틴은 영어로 Philistine이고 이 사람들이 현 팔레스타인 인이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후 기원전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기원후 135년경에는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7세기에 아랍인들이 동로마 제국에게서 또다시 이 지역을 빼았아 11-13세기 사이의 십자군 전쟁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후 계속해서 아랍 인의 영토로 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 계획에서 유태인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 촉진, 유태인 전체의 결속 도모, 유태인의 민족의식 강화와 육성,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국 정부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예비적 조치 강구 등을 결의하였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미끼로 아랍과 이스라엘 양쪽에게 양다리를 걸치면서 아랍민족과 유태인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영국은 먼저 아랍인의 협력을 얻어 터키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아랍 독립국가를 창설시켜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당시 카이로의 영국 외교관 맥마흔은 1915년 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전쟁시의 외교정책에 대한 내용이 담긴 문서를 메카의 태수였던 후세인에게 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랍인들이 자기 편이 되어 전쟁에 참가하면 전쟁이 끝난 뒤 그 대가로 후세인이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의 독립을 보장해준다는 것이었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문서의 내용을 믿으면서 터키에 반기를 들고 영국의 편에 서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영국은 유태인들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약속을 하면서 그들의 전쟁 지원을 유도하였다.   영국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이용하여 미국의 전쟁 참여를 유도하고 유태계 재벌들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1917년 11월 외무장관 발포어가 영국 국적의 저명한 유태인 로스차일드에게 서한을 보내 유태인들의 민족 향토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이를 발포어 선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양쪽에게 한 약속을 모두 폐기처분하고 1920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영국은 그 후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태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 등이 유태인의 이주는 더욱 늘어났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이 소유한 토지도 점점 늘어났으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태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태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 [하가나]를 조직하여 영국에 대한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추구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민족과 유태인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무책임하게도 유엔에 떠넘겼다.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 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1. 제1차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  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퇴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2. 제2차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아랍과 유태 양쪽은 서로 군사력 증강에 미친 듯이 뛰어들었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 축출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행을 거부하고 이스라엘의 관문인 티란 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1956년 10월 29일 오후 3시 30분, 이스라엘군은 16대의 수송기에 공수부대원들을 이집트 영토에 투하함으로써 갑자기 전쟁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스라엘군은 이집트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이스라엘 군이 너무나 잘 싸우는 바람에 이스라엘군은 순식간에 이집트의 주요 요새들을 장악하고 이집트 영토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공격부대의 허리가 너무 길게 노출되어 당황한 이스라엘군 사령부가 황급히 정지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시나이 반도를 건너서 병사들은 수에즈 운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한편 갑자기 영불 연합군의 공격이 연기되었다는 통보가 들어오자 그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이스라엘은 내친김에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 버린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과 감시를 위한 유엔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이 당시 이집트 공군은 이스라엘과 비교할 때 훨씬 우세한 장비와 기종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전과가 없었음에도 별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쟁 이전 이스라엘측이 가장 경계하던 것도 이 이집트의 공군인데, 정작 이들은 한 번도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   이 원인을 당시 이스라엘군 사령관이었던 다얀 장군은 한마디로 말했는데, "비행기는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조종사들의 엄청난 수준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개전당일 이집트군의 전화선을 절단하라는 임무를 띠고 출격한 두 대의 무스탕 전투기는 동체에 매단 갈고리를 전화선에 걸려고 시도하다가 갈고리가 떨어져 나가 버리자 당황한 그들은 수차례의 극초저공 곡예비행 끝에 날개로 전화선을 절단해내 버렸다.   프로펠러가 전선에 감기거나 지면에 충돌하는 위험을 무릎쓴 이들의 높은 책임감과 절묘한 조종술에 비해 이집트의 공군은 이스라엘군의 기지를 폭격하라는 임무를 받고 날라간 IL-28일류신 폭격기는 이스라엘군의 대공화기가 기다리는 기지근처에도 오지도 않고 텅빈 황무지 야산에 폭탄을 쏟아내고 돌아가 버린 뒤 지휘부에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보고하는 어이없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

 

3. 제3차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시리아는 게릴라의 기지가 되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인 골란 고원에서는 시리아군이 철벽의 요새를 구축하고 항시 이스라엘 본토를 향해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또한 이 때에 지나친 군비 확장으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른 이집트와, 건국 초기의 정신이 약화되어 국민들을 단결시킬 필요가 있는 이스라엘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친 소 노선을 걷고 있는 이집트와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시리아에 대해 소련은 막대한 군사 지원을 감행했으며, 이러한 소련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군사 지원을 해 줬고, 이스라엘군도 지원받은 서방측 무기를 사막 지형에 맞게 개조하여 배치했다.   이에 따라 1,2차 중동전쟁이 양민족간의 생존권 투쟁이었던데 반해서 3,4 차전쟁은 강대국간의 대리전이라는 성격이 짙어진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위기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을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배치, 유엔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이스라엘의 홍해쪽 해안인 아카바만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기습함으로서 전쟁은 시작되었고,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로 이집트군을 궤멸시키고 4일만에 시나이 반도를 점거했다.   곧이어 이스라엘군은 시리아의 골란고원과 요르단의 웨스트 뱅크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골란 고원은 막강한 방어 시설이 갖추어 져 있었고, 요르단군은 이스라엘과 같이 뛰어난 능력의 서방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소총의 총신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피가 내처럼 흐르는 대 혈투 끝에 이스라엘군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4. 제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강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갑작스로운 사망으로 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수출 금지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5. 레바논 분쟁

레바논은 원래 존재하던 나라가 아니라 40년대 후반 영국이 이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중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위성국이었으며, 또한 그리스, 터키계 이주민들이 많았던 터에 다른 중동국가들과는 달리 기독교를 신봉하는 주만들이 많았다.

국내의 기독교 정치세력과 회교 세력은 '국가평의회'라는 합의 기구를 만들어 놓고 여기서 의견 조정을 거쳐 양쪽이 교대로 집권해 나가며, 1948년의 제1차 중동전에는 주변 회교국가들의 권유에 따라 비록 소규모이지만 군대를 파병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전쟁 이후로 문제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함에 따라 이스라엘 땅에서 살던 약 4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으로 말려 들어온 것이다. 그후 20여년간 이들은 남부 레바논 일대에 대규모의 난민촌을 형성하고 더부살이를 시작했는데, 회교도와 기독교도가 위태로운 균형을 가까스로 잡아가고 있던 이 작은 나라에 급격히 회교 인구가 불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한편, 회교 국가들에게 있어 PLO 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의 훌륭한 선봉이었지만, 어린 아이조차 장난감보다 기관총을 더 잘 다루는 어떤 나라도 받아 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들은 이 PLO를 약소국 레바논에 떠넘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갑자기 이슬람의 세력이 커진 레바논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도보다 더 맣은 권력을 갖으려 하기 시작했다.   PLO를 앞세운 이슬람 교도들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곧 분쟁이 일어나고, 이 분쟁은 점점 꼬여 같은 종교 사이에서도 종파에 따라 치고 받는 혼란이 시작된다.

그러자 시리아는 이곳에 3만의 군대를 평화 유지 명목으로 보내 사실상 정령해 버리고, 이에 이스라엘도 레바논을 침공하여 남부에 괴뢰국가를 세운다.   한동안 유지되는 듯 하던 평화는 다시한번 깨지고, 이번에는 소총 따위의 작은 무기가 아닌 바주카와 탱크로까지 무장한 기독 민병대와 PLO는 대규모 충돌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대리전이었다.   뒤에서 이들을 지원하던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도 점점 발전하여 드디어는 양국 정규군이 레바논에 침입하여, 레바논 영토 내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역시 이번에도 아랍측이 패배하여 버렸다.   시리아군이 패퇴한 뒤 PLO의 거점에 폭격을 가함과 동시에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초토화 시킨다. 이후 레바논에는 평화가 다시 돌아왔으나 아직도 그 미래는 알 수 없다.

 

6. 그 후의 정세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이집트 경제재건의 길을 이스라엘과의 화평에서 찾고자 내외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을 결행했으며, 이스라엘의 총리 베긴도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미국의 대통령 J.E.카터는 1978년 9월 메릴랜드주 캠프데이비드에서 카터 . 사다트 . 베긴 3국 수뇌의 비밀회담을 추진함으로써 중동화평은 크게 진전하였다.   9월 17일에 「중동화평의 개요」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의 개요」의 2개 문서가 조인되었고, 10월 12일부터는 워싱턴에서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조약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이집트의 움직임에 아랍 강경파는 크게 반발하였고, 또 이집트, 이스라엘의 당사국 사이에서도 기본적 입장의 차이가 해소되지 않아 평화조약의 조인기한인 12월 17일까지 양국의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아 조약교섭은 그 후로 난항을 거듭하였다.

교섭의 교착을 타개하기 위해 1979년 3월 대통령 카터는 총리 베긴을 미국으로 초치하여 새로운 제안을 한 다음 직접 이집트를 방문, 대통령 사다트와 회담 후 이스라엘로 가서 총리 베긴과 회담하였다.   교섭은 결렬 직전인 12일 타결로 향했으며, 13일 대통령 사다트가 미국의 신제안을 수락하고, 14일 이스라엘 각의도 그 제안을 수락, 26일 워싱턴에서 대통령 카터 입회하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30년 동안에 4회씩이나 대격전을 벌였던 양국의 전쟁상태에 종지부가 찍혔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며,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승인하여 정상의 외교관계를 수립함을 골자로 한다.   조약 발효 후 이스라엘은 3년 예정으로 단계적으로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1980년 1월에 양국은 대사를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현안의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에 관해서는 조약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자치권부여의 교섭을 시작하여 1년 이내에 종료시키되, 최종적인 지위를 정하는 교섭은 1985년 4월 이후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동분쟁의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이 아직도 모호하기 때문에 태반의 아랍 제국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심한 반발을 나타냈으며, 단독화평으로 나간 이집트의 배신을 비난하며 이른바 이집트 제재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조약이 중동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며 아랍 제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포괄적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가가 의문시되었다.   게다가 1981년 10월 이집트대통령 사다트의 피격사망, 동년 11월 미국대통령 카터의 선거패배,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그 해 8월 PLO 의장 아라파트의 베이루트 철수 등 격동하는 중동정세의 변화는 중동평화의 정착을 요원한 앞날로 밀어내고 있는 듯 하더니 1993년 팔레스타인을 대표한 PLO와 이스라엘이 9월 상호승인을 교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타협안을 마련, TV화면을 통해 전세계인이 양측 수뇌의 서명장면을 시청하였다.   이 사실로 중동에 전면적 평화가 올 것이 기대되었으나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은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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