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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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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자 군  전 쟁



(1) 십자군전쟁의 배경


1. 교회의 신장

  로마 제국의 멸망1),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후, 현재의 서유럽 지역은 이민족들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서로마를 멸망시키2)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로마의 용병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상당히 많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나라는 망해도 종교는 유지됨을 미뤄보면, 기독교에 있어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일종의 기회였다.   로마에서 기독교는 로마 황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는 신정일치神政一致로 볼 수 있겠지만, 로마 황제가 종교 지도자적 성격보다는 세속 군주적 성격이 강하였음을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입장에서 로마 시기는 세속권에 의해 신성권이 장악당한 것과 같은 시기였다. 그러므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기독교는 오히려 더 크게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한다.

1) 로마제국은 395년 동·서로마로 분할 통치된다.   이는 넓어진 제국의 영토를 더 이상 한 명의 황제가 다스리는 것이 힘들어진데 따른 조치였다.   이때 동쪽은 테오도시우스의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다스렸으며, 서쪽은 차남인 호노리우스가 밀라노를 수도로 삼아 다스렸다.  

2)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황제가 폐위됨으로서 멸망하였다.

  7세기경부터 개종된 게르만人이 다른 게르만人을 개종시켰다.   이는 종교의 파급효과를 그대로 보여준다.   계속된 게르만족의 개종이 잇달았으며, 그에 따른 교회의 권위는 높아졌다.   10세기 들어서면 오토 대제의 지원 아래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특히 많은 군주와 영주들로부터 토지를 기증받아 종교적인 영향력 뿐 아니라 세속적인 권한까지 성장하였다.   특히, 로마교회는 피핀으로부터 막대한 토지를 기증받아 막강한 권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로마교회의 수장은 교황으로서 서유럽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1세기 말엽 교황에 그레고리 7세가 등위하면서 신성권은 더욱 강대해진다.   그레고리 7세는 클리뉘3) 출신답게 교회를 정화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직서임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4)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하게 된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에게 파문을 선언하였으며,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에게 폐위를 선언함으로서 대응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이에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사죄한다(1077, 카노사의 굴욕).   이로서 교황권은 황제권에 완전한 승리를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신성권이 세속권을 장악하는 시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이후 교황은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된다.

3) 클뤼니 수도원은 성직자의 세속화 및 성직매매 등으로 교회가 타락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클뤼니 수도권은 여타의 수도원들이 많은 토지와 농노를 소유하고, 도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것과 달리, 수도사에게 금욕적 삶을 강조하였으며 스스로 노동하도록 하였다.

4)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의 왕이 서로마 제국의 정통후계자임을 교황이 인정해준 이후 얻은 권위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서로마 황제의 권한을 거의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러므로 서로마 황제가 지녔던 성직서임권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이어졌다.   후일 나치스 독일이 제3제국으로 통칭되는데, 제1제국이 신성로마제국, 제2제국이 19세기의 독일제국에 이은 세 번째 독일 제국이란 의미라 볼 수 있다.


2. 이슬람과 동로마

  로마의 동서 분열이후, 서로마는 5세기 말엽 멸망하였다.   하지만 동로마는 15세기 중엽까지 유지된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교회에 대한 권한이 교황에게 넘어간 것과 달리 동로마는 여전히 황제가 교회의 모든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사실상 교회가 동·서로 나뉘어졌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동로마는 여전히 건재하였으며, 또한 강력하였다.   동로마는 서로마가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던 때에도 여전히 이민족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으며,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로마는 급진적으로 확장하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든든한 요새였다.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동로마는 북쪽으로는 이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들과 싸워야했으며, 동쪽으로는 강력하게 도전해오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야만 하였다.   하지만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은 아직은 동로마의 힘을 넘보기에는 세력이 모자랐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강력한 아시아의 국가들을 제압하며 서진해오고 있었다.   이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는 이슬람의 셀주크 투르크에게 패배하였다.   이 패배는 단순한 전투에서의 패배가 아니었다.   동로마 황제가 생포당하는 굴욕적인 패배였다.   또한 기독교에 있어서 성지인 예루살렘이 점령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였다.   게다가 1076년에는 크로아티아가 동로마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는 동로마의 국력이 이전과 많이 달라진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술래이만이 소아시아 전역을 포괄하는 술탄국을 세우고 니케아를 수도로 삼은 것은 동로마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소아시아는 동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으며, 중요한 병력 공급원이었다.   소아시아의 상실은 동로마의 국력 약화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셀주크 투르크로 대표되는 이슬람 세력 역시 분열의 조짐을 나타내고 있었다.   루움 총독 술레이만이 루움 셀주크를 창건하였다.   그럼에도 셀주크 투르크는 1084년 시리아·소아시아 정벌을 종결한다.   원래 이 지역은 동로마의 영역이었다.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동로마의 힘은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부터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086년 루움 셀주크가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또한 이집트 역시 셀주크 투르크와는 별개로서 존재하였다.   이는 이슬람 세력이 많이 분열되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럼에도 셀주크 투르크의 힘은 동로마를 위협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예루살렘을 되찾기에는 동로마의 힘은 너무도 모자랐다.


(2) 십자군전쟁의 전개

1. 십자군전쟁의 시작

  셀주크 투르크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위협받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1095년 3월에 로마 교황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교황은 그레고리 7세로부터 막강한 교황권을 이어받은 우르바노 2세였다.   이에 아미앵의 피에르가 십자군을 권유하였으며, 우르바노 2세는 11월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운동을 호소하였다.   이에 제1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여기서 우르바노 2세가 동로마의 요청에 흔쾌히 응한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로마의 멸망으로 서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권한은 상당 부분 교황에게 넘겨졌으며, 성직서임권 다툼의 결과 교황권은 사실상 최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반쪽의 권한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동로마는 건재하였으며, 동로마 교회의 권한은 여전히 동로마 황제에게 있었다.   우르바노 2세는 온전한 교회의 최고의 지위를 원하였으며, 이는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동로마 황제의 교회에 대한 권한을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때문에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를 지원하여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길 원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동로마 교회에 대한 권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로마의 지원 요청은 단순한 콘스탄티노플의 방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기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차례도 함락되지 않은 당대 최고의 요새였다5).   그러므로 아무리 셀주크 투르크의 힘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공격의 의미로서 지원을 요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가 시리아와 소아시아 정벌을 완료한 이후 동로마에 대한 더 이상 대규모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 동로마의 중요한 거점인 소아시아를 셀주크 투르크가 차지하고 있었던 점 등을 따져보면, 오히려 동로마의 의도는 소극적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통해 침공을 막는 보다 적극적 방어였으며, 더 나아가 소아시아의 회복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 그 전에 한 차례 함락되는데, 이는 제4차 십자군 때의 일이다.   당시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으며, 시민들에게 황제가 살해당한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게 함락된다.   십자군은 어떤 의미에서 동로마의 원군이었으니, 적이라 봐야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의 의도는 각기 달랐을지라도, 이슬람을 공격한다는 목적에는 일치하였다.   때문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전을 소리 높여 외쳤고,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충만한 신앙심으로 이에 열광적으로 대답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의도 때문에 십자군은 처음부터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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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1차 십자군

  유력 제후가 아닌 가난한 기사와 농민으로 구성된 십자군은 종교적 열망으로 부풀어 오른 채 출발하였지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성전을 치르러 가기에는 그 행태가 너무나 추했다.   육로를 이용해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십자군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 약탈했으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해야만 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약탈을 낳았다.   때문에 이들 가난한 십자군은 여러 갈래로 출발했음에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것은 두 무리뿐이었다.   하지만 이들 마저도 전력으로서 가치는 거의 없었다.

  제1차 십자군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유력 제후와 기사들로 구성된 부대는 1096년 8월에 유럽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모두 세 갈래로 콘스탄티노플을 향한다.   고드프리 드 부이용은 헝가리와 불가리아를 지나 다뉴브강을 따라 내려가는 육로는 선택하였고,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의 병력은 이탈리아 반도를 남하하여 아뿔리아에 다다른 다음, 두라쪼로 건너갔다.   가장 어리석은 군대는 뚤루즈伯의 군대였다.   이들은 이탈리아를 가로질러 베네치아에 도착한 다음,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두라쪼까지 남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뚤루즈伯은 험난한 산맥과 광포한 주민들 때문에 많은 병력을 상실하였다.   이렇게 십자군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보헤몽과 그의 조카 땅크레드가 아뿔리아에서 십자군에 합류한다.   만약 제1차 십자군에서 가장 의도가 의심스러운 자를 찾는다면 다름아닌 보헤몽이 될 것이다.   보헤몽은 이탈리아에서 영지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리아나 소아시아에서 자신의 영지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십자군은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바랐던 군대가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그의 지휘를 따를 잘 훈련된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도착한 십자군은 결코 그의 지휘를 받아들이지 않을 유력 제후들이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왕과 프랑스왕의 형제들인 노르망디公 로베르와 베르망드와伯 위그, 플랑더즈伯 볼드윈과 그의 형제인 下로렌느公 고드프리 드 부이용이 이끌고 온 플랑더즈와 제국의 북서부 봉통들의 기사들, 뚤루즈伯 레이몽 드 생 질의 지휘를 받는 남부 프랑스의 기사들이었다.   누구도 이들이 누군가의 지휘를 받아들이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1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시점에서 십자군에 대해서 더 살펴보도록 하자.   단순하게 십자군에 대해 생각한다면, 십자군은 그야 말로 종교적 열망에 사로잡힌, 성전에 몸을 바친 순례자 집단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잠깐 언급한 십자군의 행태는 그러한 마음을 가진 자로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면 십자군에는 종교적인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제1차 십자군의 구성원들은 귀족, 평민이 어우러져 있었지만, 이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으로 십자군에 동참한 것이 아니다.   귀족들은 대부분 장남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즉,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가 귀족의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중세유럽을 지배한 것은 기독교만이 아니었다.   종교라는 요소가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세의 봉건제도와 같은 구조적인 면을 구성한 것은 게르만적 전통이었다.   귀족을 비롯한 중세 유럽인의 일상생활은 기독교와 게르만적 전통의 두 가지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런데 게르만적 전통에 따르면 모든 재산은 장남에게만 물려주도록 되어있었다.  

즉, 귀족의 자식 가운데 장남을 제외한 경우는 가문의 영지가 얼마나 되든지 상속권이 없었다.   십자군이 일어나던 11세기는 중세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절정기에 장남을 제외한 귀족의 자식들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칫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동로마의 요청으로 십자군이 일어났다.   상속권이 없는 귀족의 자식들에게 이것은 기회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많은 토지를 얻게 된다.   그런데 십자군이 향하는 이슬람 세계의 토지는 서유럽의 어떤 나라, 어떤 가문의 소유도 아닌, 이를 테면 서유럽인의 눈에는 무주공산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귀족의 자식들이 십자군에 참여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장남이 아니었다.   그들이 십자군에 참가한 목적은, 물론 종교적인 열망 때문인 경우도 있었을 테지만, 적지 않은 경우 자신의 영지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평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십자군에는 많은 평민들도 참가한다.   하지만 평민들은 더욱 세속적인 목적으로 십자군에 동참하였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으리란 기대로, 상인은 무역로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부 농노나 노예들은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고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어쩌면 십자군을 일으킨 주체라 할 수 있는 교황마저 동·서 교회를 통합한 수장이 되겠다는 목적이 있었으니, 십자군에 참가한 이들이 각자 세속적 목적을 지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각기 종교적 열망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또한 그것은 한 가지 결과가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는 것, 바로 예루살렘을 탈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1096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십자군은 바로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그래서 1097년에 니케아와 에뎃사를 점령하고, 1098년 안티오키아 공령을 건설하고, 이듬해인 1099년 예루살렘 왕국과 에뎃사 백령을 건설한다.   1102년에는 트리폴리 백령을 건설하면서 제1차 십자군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제1차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했으며, 그들이 원했던 영지와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벌인 살육은 기독교 사회에서 마저 비난을 받아야 하였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직후, 무슬림을 물론이고 유대인, 심지어 예루살렘에 있던 기독교인 일부마저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러한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시기를 잘 선택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루움 셀주크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런데 십자군이 진격해가던 소아시아 지역은 루움 셀주크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알레포, 안티오크, 다마스커스는 군소제후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지역들의 무슬림 족장들은 바그다드의 통제에서 벗어나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분열된 상황에서 오직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목적 하나로 뭉쳐서 진격해오는 십자군을 막는 것은 어려웠다.   결국 정돈되지 못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제1차 십자군이 성공을 거둔 것은 절반 이상은 순전히 운에 따른 것이었다.


3. 제2차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있어서는 적지 않은 타격이 되었다. 그리고 동로마는 전열을 다시 정비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동로마와 셀주크 투르크 사이의 전쟁에서 동로마는 상당히 밀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십자군의 공격으로 지중해 연안의 거점과 예루살렘을 상실한 셀주크 투르크는 동로마와의 전쟁에서도 타격의 영향이 미쳤다.   그 영향은 1116년에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동로마에 패배했으며, 1117년에는 동로마에게 시리아를 빼앗긴다.   이후 셀주크 투르크는 그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124년에는 베네치아가 이집트로부터 티루스항을 탈환함으로서 지중해 재해권을 장악했으며, 1134년에는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동로마에게 빼앗긴다.   동로마는 그 기세를 몰아서 킬리키아·시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1140년대를 넘어가면서 양상이 바뀐다.   셀주크 투르크가 제1차 십자군에게 그리도 쉽게 패배했던 것은 이슬람세계 내부의 분열 때문이었다.   하지만 11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슬람세계, 특히 셀주크 투르크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다.   1141년에는 에뎃사를 점령하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했으며, 1144년에는 알렙포(모술) 태수가 에뎃사 백령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1146년에는 시리아의 아크베크조가 십자군과 전투를 시작한다.   즉, 제1차 십자군이 점령지 전역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위협에 유럽에서는 제1차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한 제2차 십자군이 편성된다.   1147년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제2차 십자군을 이끌고 이슬람 지역으로 진격한다.   하지만 제2차 십자군은 엄청난 실패를 겪어야 하였다.   콘라트 3세는 니케아를 떠난지 10일 만에 투르크군에게 대패하여 자신을 포함한 병력 10% 정도만이 살아 돌아왔으며, 루이 7세는 소아시아로 진격하다가 투르크의 공격을 받고 대부분의 비전투원과 많은 수의 말과 짐을 잃었다.   이후에도 제2차 십자군은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4. 제3차 십자군

  제2차 십자군의 실패로 이슬람 세력은 여전히 십자군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는 1157년 산자르가 죽으면서 세력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에서 아이유브조가 발흥한다(1169).   아이유브조의 살라딘은 이집트의 파티마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지배한다(1171).   이로서 이집트는 정통이슬람으로 돌아선다.   이집트를 장악한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을 통합시키면서 십자군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1174년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점령하였고, 1183년에는 알렙포(모술)를 점령한다.   그리고 1186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187년 6월. 살라딘은 예루살렘왕국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왕국의 병력은 하틴전투에서 거의 전멸한다.   결국 살라딘은 손쉽게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시라아 내륙 지방을 점령하였다.

  제1차 십자군 시기에 예루살렘이 십자군에게 함락된 이후(1099) 거의 1세기 만에 이슬람세력에게 탈환되었다.   하지만 거의 1세기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한 살라딘의 군대는 1099년 제1차 십자군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데 비해 살라딘의 군대는 학살과 약탈을 하지 않았다.   이는 살라딘의 군대와 제1차 십자군이 얼마나 다른 가를 보여준다.   살라딘의 군대는 군율이 제대로 선 정규군이었다.   하지만 제1차 십자군은 잘 정비된 군대가 아니었으며,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았었다.   그것이 예루살렘 점령 직후 군대 행동의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그런 차이에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규율이 정립되지 않았던 차이가 가장 큰 이유라 하라 수 있다.

  예루살렘을 상실한 십자군은 타격을 입었다.   그것은 물질적인 타격과 함께 정신적인 타격이었다.   때문에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계획한다.   하지만 잔존병력만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십자군은 살라딘과 벌인 전투에서 연전연패하게 된다.   이는 전력의 손실을 빚었으며 원군을 필요로 하게 된다.

  제3차 십자군은 그런 상황에서 결성된다.   제3차 십자군은 애초에 영국왕 헨리 2세와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헨리 2세와 필리프는 내부 문제로 출발이 지연되었으며, 프리드리히 1세만이 1189년 단독으로 출발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혔던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는 선택하였다.   하지만 그는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   그동안 십자군을 괴롭혔던 투르크의 기마 궁수보다 더 사거리가 긴 활을 이용하여 투르크의 군대를 쉽게 물리쳤으며, 루움 셀주크의 수도인 이코니움을 재빨리 점령하였다.   살라딘은 이러한 프리드리히 1세의 진격에 위협을 느끼고 그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칼리카드누스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비록 프리드리히 1세는 죽었지만 그의 군대는 무사히 안티오크에 도착한다.   하지만 여기서 병력의 절반은 되돌아 버린다.

  이후 헨리 2세의 뒤를 이은 리차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가 1190년 여름에 중부 프랑스의 베즐레이에서 출발하였다.   두 왕은 시칠리아에서 겨우내 싸웠으며, 1191년 봄에 각기 메시나를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존엄왕 필리프가 바로 성지로 향한데 비해 리차드 1세는 키프로스에 들르게 된다.   그의 약혼녀를 태운 배를 포함한 몇 척이 태풍 때문에 키프로스로 떠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키프로스의 왕이 리차드 1세의 약혼녀를 포로로 삼으려 하였고, 리차드 1세는 키프로스를 점령한 후(1191) 키프로스 왕국을 건설한 후 성지로 향한다(1192).

  드디어 제3차 십자군은 모두 집결하였고, 이슬람 세력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189년 여름에 기독교 군대는 아크레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1190년에 프리드리히 1세의 귀향하지 않은 병력이 합류하였고, 다시 1191년 초여름에 존엄왕 필리프와 리차드 1세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전쟁도중 리차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 여전히 다투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왕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리차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 세력으로 갈려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때문에 효과적으로 아크레를 공략하지 못한다.   하지만 식량이 떨어진 아크레는 십자군에 항복한다.   그런데 아크레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풍토병에 걸린 존엄왕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간다.   하지만 리차드 1세는 그대로 남아서 십자군을 이끈다.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탈환하리라는 의지를 불태우던 때와 달리, 예루살렘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리차드 1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지킬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주력부대를 퇴각시킨 상태였다.   만약 리차드 1세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차드 1세는 병력을 남부 팔레스탄인의 아스칼론에 견고한 성채를 세우고, 살라딘과 화평을 맺었다.   리차드 1세는 화평 조건으로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막지 않을 것과 자파와 그 밖의 여러 해안 도시를 라틴 제후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리차드 1세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193년 살라딘이 사망하였고, 1199년 리차드 1세가 사망한다.

  여기서 살펴 볼만한 점은 리차드 1세와 필리프의 대립이다.   유럽의 강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젊은 왕들은 서로의 이익 때문에 대립한다.   게다가 십자군 내부에서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두고 둘로 나뉘었으며, 각각 리차드 1세와 필리프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사실 필리프가 처음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했을 때, 필리프는 십자군의 지도자로서 군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리차드 1세가 도착하면서 필리프의 입지는 매우 약화되었다.   이는 젊은 왕들의 자존심의 문제였으며, 권력 다툼에서도 불리해지자 필리프는 더 이상 예루살렘 왕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풍토병까지 걸리자 마음이 약해진 필리프는 퇴각을 결정하였다.   또한 필리프는 더 이상 십자군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유럽으로 빨리 돌아가 세력을 확장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가자 리차드의 동생인 존을 사주하여 영국에서 존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으며, 리차드가 귀환할 때 곤경에 빠지도록 만든다.   반대로 리차드 1세는 십자군을 이끌어 살라딘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비록 예루살렘 탈환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나름대로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유럽으로 돌아와서는 왕권을 되찾고 유럽에서 필리프를 몰아세웠다.   결과적으로 필리프는 십자군에서도 유럽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였다. 

  제3차 십자군은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 내부의 분열과 리차드 1세의 생각 변화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최악의 십자군으로 불리는 제4차 십자군이 1202년 6월 출범한다.   제4차 십자군이 최악의 십자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이슬람세력이 아닌 동로마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5. 제4차 십자군

  1202년 동로마는 제위 계승 문제로 분열되어 있었다.   1203년 6월 제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포위한다.   동로마의 입장에서는 전혀 의외의 상대에게 습격을 당한 격이었다.   1203년 7월이 되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십자군에게 정전을 제의한다.   8월에 알렉시우스 4세와 이사크 2세가 동로마를 공동 통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1204년 2월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두 황제를 살해한다.   그리고 4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거하고 약탈한다.   또한 십자군은 라틴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나라들이 난립함으로서 동로마는 분열되었다.   사실상 제4차 십자군의 활동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제4차 십자군은 왜 동로마를 공격한 것일까.   그 이유는 당시 동지중해의 상업분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동지중해의 가장 중요한 상업권은 동로마와 교역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 당시 십자군을 수송한 것은 베네치아의 상인들이었으며, 1081년 로베르의 그리스 침략을 저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래서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보상의 의미로 동로마 교역에 있어서 많은 특권을 부여하였고, 동로마 상업의 대부분이 베네치아 상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경계심을 품은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피사인들에게 베네치아 상인들과 비슷한 특권을 주어 견제하였으며, 그의 아들 요한 2세는 제노바인에게도 비슷한 권리를 주어 베네치아 상인들의 경쟁자를 늘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은 그동안 동로마 교역을 거의 독점하였던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는 불만을 가지도록 하였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상당부분 베네치아 상인들의 사주나 충동질에 의한 것이 많다.   즉,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로마 교역에서 나오는 많은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동로마 교역을 독점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제4차 십자군을 사주하여 동로마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당시 제4차 십자군을 수송한 것은 다름 아닌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상선이었다.   때문에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베네치아 상인들은 좋은 결과가 나올 경우 보상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동로마를 공략할 경우에 더욱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결국 제4차 십자군은 종교적 열망보다는 물욕을 쫓아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하였다.   때문에 제4차 십자군은 가장 더러운 십자군이란 오명을 얻게 된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 십자군의 행태 역시 그러한 오명에 빛을 더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3일간 마음껏 약탈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단순히 약탈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약탈은 그리스의 기독교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며, 창녀를 소피아 대성당의 총주교 좌석에 앉히는 등 신성모독도 서슴치 않았다.   비록 로마교회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런 행동은 십자군의 행동이라고 믿기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교황은 처음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완강히 거부하던 것과는 달리 현실과 타협하였다.   교황이 반대했던 것은 성지로 가지 않는 다는 것이었으며, 오히려 라틴제국이 들어서자 환영하였다.   이미 일은 되돌릴 수 없었고, 로마교회의 영역이 동로마 지역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교황이 원하던 동·서교회의 통합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그 목적에 다가간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 점령 과정에서 신성모독과 3일간의 무차별적 약탈이 자행되었으나, 교황이 이를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제4차 십자군의 결과 동로마는 분열되어, 라틴제국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밑으로 테살로니카 왕국, 아테네 공국, 아케아 공국과 그 밖의 나라들이 들어섰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큰 구역과 유보에아 전역, 크레타, 코르푸, 두라쪼 등의 많은 중요한 항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베네치아 총독으로부터 수많은 섬나라에 나라를 세우는 것을 허용받았다.   동로마의 제후들은 십자군이 영역 밖에 나라를 세웠다.   동로마 황제의 사위였던 테오도르 라스카리스는 니케아 제국을 세웠으며, 알바니아의 산악지역에는 황실의 사생아가 에피루스專制國을, 콤네누스조의 두 왕자는 흑해 남해안을 포괄하는 트레비존드 제국을 세웠다.   이 시기부터 동로마는 내전을 1261년 재통합하기까지 겪어야 하였다.


6. 제5차 십자군과 소년십자군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동로마가 분열된 이후, 1205년 베네치아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1208년에는 알렙포(모술)와 통상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십자군은 1213년까지 알비·왈도파에 대항하여 싸웠다.

  1217년 헝가리왕이 십자군을 주창한다.   1218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소년십자군이 출발하지만 실패하였다.   소년십자군은 해상으로 이동하였는데, 기아에 허덕이다 도착도 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으며, 일부는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하였다.   결국 소년십자군은 도착도 하지 못하고 붕괴되어 버렸다.

  제5차 십자군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집트를 상대로 전과를 올렸다.   1219년 예루살렘왕 존이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점령하였으며, 이집트 술탄은 다미에타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예루살렘과 교환할 것을 십자군에 제의한다.   하지만 십자군은 이를 거부한다.   1220년에는 십자군이 카이로로 쳐들어가 불태웠다.   하지만 1221년에 이집트군이 십자군을 격파하고, 8년간의 휴전에 들어가는데, 이때 다미에타를 포기한다.   이렇게 십자군과 이집트의 아이유브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중에도 동로마는 분열되어 내전을 겪고 있었다.


7. 제6차 십자군

  122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제6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의 아이유브조가 타미에타를 상실함으로서 예루살렘 방어에 적극적일 수 없었다는 점, 십자군과 8년간 휴전을 하고 있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유브조가 살라딘이 살아있던 시절에 비해서 힘이 매우 약해졌다는데 가장 큰 원인이 있으며, 다음해 십자군과 휴전을 10년 더 연장한데서 알 수 있다.   이미 아이유브조는 예루살렘까지 방어할 전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타미에타를 십자군에 상실했으며, 카이로는 불태워지기 했으니, 이집트를 방어하기에도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점령 이후 1229년 예루살렘왕에 등극한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 내에 반황제파가 대두되자 신성로마제국으로 돌아갔다.

  1230년대에 들어서면 십자군전쟁에 예기치 않은 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은 동쪽으로 불어온 태풍이었다.   몽골이라고 하는 강력한 태풍이 유럽뿐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휩쓸기 시작한다.   우선 1194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이란을 탈취했던 코라즘이 1231년 몽골에 멸망하였다.   1236년에는 몽골이 동유럽 원정에 나서서 1237년 모스크바, 1240년 키예프를 각각 점령하였다.   또한 1241년에는 헝가리를 침입하고, 쉴레지엔을 침공하였으며, 핀란드까지 침공한다.   그 중 쉴레지엔 침공할 당시 리게닛츠·발시타트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1242년에는 쿠자다그에서 루움 셀주크를 격파하였다.   루움 셀주크는 1078년에 루움 총독인 술레이만이 창건하여 1086년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이처럼 몽골의 침입은 유럽과 이슬람세계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8. 제7차 십자군

  1248년. 제7차 십자군이 출발한다.   제6차 십자군은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끌었다.   1254년까지 이어진 제6차 십자군은 최후의 십자군으로 봐야한다. 하지만 제7차 십자군의 활동은 미미하였다. 1249년 카이로를 공격한 것 정도가 가장 큰 군사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7차 십자군이 진행되는 동안 이집트에서 아이유브조가 몰락하고 아이베크가 이끄는 맘루크조가 등장한다. 이후 십자군은 퇴색일로를 걷게 된다.   1260년 맘루크조의 장군 바이바르스가 일 칸국의 훌라구를 격파하여 시리아를 장악한 후에 술탄에 올랐으며, 1265년에는 맘크조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십자군으로부터 탈취한다.

  그 사이 동로마는 분열을 마치고 다시 부흥한다(1261). 하지만 동로마가 십자군전쟁에 끼어들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9. 십자군전쟁의 종결

  1268년에 맘루크조는 안티오키아 공령을 멸망시켰고, 1280년에는 팔레스타인 공략, 1281년에 알렙포(모술)를 침략하여 시리아에 진출한다. 1289년에는 트리폴리 백령을 멸망시켰으며, 1291년에는 악콘을 점령하였으며, 이로서 예루살렘 왕국이 멸망한다.   이어서 티루스·베이루트·톨로즈를 점령함으로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버렸다.   이로서 십자군 전쟁은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의지에 따라 시작된 이후 약 200년 만에 그 끝을 보았으며, 결과는 이슬람세력의 승리였으며, 바꾸어 말하면 십자군의 실패로 마무리 되었다.

  십자군은 위에 언급한 7차례의 큰 십자군원정이나 소년십자군 이외에도 10여 차례나 되는 소규모의 원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성지탈환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제대로 수행한 십자군은 제1차, 제6차 십자군뿐이었다.   제2차 십자군은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실패로 끝났으며,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강화를 맺은 후에 돌아섰다.

제4차 십자군은 어떤가. 가장 더러운 십자군으로서 동지라 할 수 있는 동로마를 물욕에 눈이 어두워 공격하였다.   소년십자군은 제대로 도착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집트에서 출발한 제6차 십자군은 이집트의 예루살렘과 다미에타 교환을 거부하였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성지를 원하였다면 그 제의에 동의 했을 것이다.   제7차 십자군은 최후의 대규모 십자군이었지만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대규모 십자군 원정이 이런데 소규모인들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결국 십자군은 실패하였다.






(3) 십자군전쟁의 결과

1. 이슬람세계

  이슬람세계에서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한다.   바로 오스만 투르크다.   1299년 오스만 1세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가 성립되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는 차근차근히 동로마를 공략하였다.   1326년 동로마의 브루사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으며, 1330년에는 니케아를 점령한다. 1353년에부터 유럽침입을 본격화하여, 1357년 가리폴리 점령으로 발칸반도에 진입하였다. 1360년에는 왈라키아를 급습하고, 1363년에는 제1차 마리차강 전투에서 발칸 연합군을 격파한다.   1365년에는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의 고립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1369년에는 아드리아노플로 천도하여 침공을 더욱 본격화하였다.   1371년에는 제2차 마리차강 전투에서 세르비아를 격파하고 마케도니아를 침입한다. 1385년에는 소피아를 점령하고, 롯소보 전투에서 발칸연합군을 다시 격파하여 발칸반도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1413년 메흐메트 1세에 의해 제국통일이 완성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지속적으로 동로마를 공략하였으며, 1422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으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스탄불이란 이름으로 오늘날도 터키의 수도로 이어져 오고 있다.


2. 동로마제국

  동로마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1095년 3월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원군을 요청한데서 십자군이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로마가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이슬람세력에게 상실했던 지역을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었으며, 더욱 큰 이득은 나라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십자군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동로마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되기 훨씬 이전에 멸망하였을 지도 모른다.   십자군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세력이 동로마를 공격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는 분명 동로마의 수명을 연장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십자군이 동로마에 이득만 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제1차 십자군은 이동하는 길에 많은 약탈을 자행하여 동로마에 피해를 입혔고, 제4차 십자군의 경우, 동로마를 직접 공격하여 동로마에 라틴제국을 건설하기까지 한다.   결국 분열된 동로마는 한동안 내전을 겪느라 힘을 비축해야 할 시점에서 힘을 낭비하고 만다.

  1291년 십자군 세력이 완전히 축출되자 동로마는 이슬람세력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더 이상 동로마를 막아줄 방패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1261년 다시 부흥한 동로마는 끈질기게 나라를 지켜나간다.   1266년에는 미카엘 8세의 딸을 깁차크 칸국의 벨키칸에게 시집보내었다.   하지만 벨키칸이 그해 전사함으로서 별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어려운 형국에서 1677년 샤를이 알바니아왕을 자칭하여 독립하였으며, 미카엘 8세는 1281년이 되어서야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로마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스파니아의 카탈란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도 하고(1305~1307), 1342년부터 1349년까지는 텟살로니카에서 폭동이 일어난다.   1349년에 루마니아인들이 몰도바 공국을 수립한다.   1388년에는 아테네 공국이 소멸되었고,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1423년에 베네치아에 텟살로니카를 매각하였다.   그리고 1430년 아케아 대공국이 소멸됨으로서 동로마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   물론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이란 요새에 기대어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해왔다.   하지만 1453년 콘스탄티노플마저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됨으로서 동로마는 멸망하고 만다.


3. 로마교회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교황권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결과적인 실패는 교황권의 몰락을 함께 가져왔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난 몇 년 후인 1303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아나니 굴욕을 겪어야 했으며, 1305년 교황은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에 의해 프랑스에 억류당하는 상황을 겪는다.   이것이 1309년의 아비뇽 유수 로 이어졌으며, 1377년 아비뇽 유수가 종결된 이후에는 아비뇽 교황청의 교황과 로마 교황청의 교황,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대분열을 1417년까지 겪어야 하였다.

  1417년 대분열이 종결되었지만, 로마교회 교황의 권위는 더 이상 세속 군주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그저 종교적인 권위로 국한되었다.   결국 교황권의 절정기에 일으킨 십자군 전쟁은, 십자군 전쟁 차제도 실패하고 교황권의 약화 및 세속권의 상실을 가져온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4. 서유럽

  십자군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무려 200년 가까이 이어진 십자군전쟁은 서유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에서 향신료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위에서 말하였듯이 십자군전쟁은 200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가 6차례, 소규모는 10여 차례 십자군이 이슬람세력과 싸웠으며, 십자군이 세운 국가에서 짧게는 수개월에서 아예 정착하는 경우도 많았다.   십자군들은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이슬람식 식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기후를 비롯한 많은 조건이 서유럽과 달랐기 때문에 서유럽식 생활은 그곳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십자군은 필연적으로 이슬람 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이러한 요소들은 십자군들의 생활 자체를 바꿔놓았다.   이슬람식 생활에 익숙해졌으며,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는 이슬람식 음식에 길들여졌다.   그들의 식습관은 서유럽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찾았으며, 십자군전쟁기간 동안 동원된 인원을 생각해본다면 이들은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그들 전부가 그러진 않았더라도 상당수는 향신료를 필요로 하였으며, 그것만으로도 많은 향신료를 소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십자군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그러한 식습관은 그대로 민간에도 퍼져 나갔으며, 이는 향신료 시장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십자군전쟁을 전후의 서유럽 향신료 소비는 질이나 양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십자군전쟁이후 향신료 소비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향신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시아에서 생산된 제품들, 예를 들자면 비단이나 양탄자 같은 물품들의 소비가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이러한 물품의 교역은 전부 이슬람 상인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이슬람 상인들은 많은 중개이익을 올렸다.   그리고 그 부분은 고스란히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떠넘겨 졌으며,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더 높은 가격으로 서유럽 지역에서 상품을 판매하였다.   어느 정도의 가격 차이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이슬람상인이 원가의 10배의 가격으로 베네치아 상인에게 넘기고, 베네치아 상인은 다시 그것의 10배의 가격으로 서유럽 지역에 판매하였다.   그러므로 서유럽 소비자는 원가의 100배의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격이다.   하지만 실재로는 그 이상의 폭리를 베네치아 상인들이 누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유럽인들의 입장에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이 신항로를 개척에 나선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즉, 지중해 무역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의 맞서 원산지와 직접 교역이 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항해시대 개막이었다.

  십자군전쟁의 직접적 영향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 영향으로 발생한 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는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멸망하면서 많은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오면서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동안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많은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들은 귀족 못지않은 삶을 영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삶의 질에 있어서도 높은 수준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르네상스가 서유럽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서유럽에 큰 변화를 가져온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르네상스의 출발이 십자군전쟁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십자군전쟁이 갖는 의미를 알 수 있다.


(4) 십자군의 의미

  십자군의 의미는 단순히 종교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이 종교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전쟁이었으며, 상업전쟁이었다.   또한 영토분쟁이었다.

  사실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던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종교전쟁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슬람, 셀주크 투르크에 빼앗긴 소아시아 지역의 회복을 원하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황에게 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군전쟁의 원인은 단순한 영토분쟁이었다.

  단순한 영토분쟁이었던 문제를 종교전쟁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교황이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의 의도와는 달리 교황은 이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보았다.   즉, 성지의 회복 문제로 바라보았다.   교황이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부터 이 문제는 단순한 영토분쟁에서 벗어나 성전, 즉 종교전쟁으로 확장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영토분쟁의 요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십자군전쟁을 통해서 동로마는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토분쟁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번졌으며, 십자군은 점령지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십자군전쟁은 순수한 성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십자군에 참여한 귀족들은 영토를 바랐던 것이다.

  상업전쟁의 요소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제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제해권 장악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자신들의 무역 독점에, 이제는 방해물이 되고 있는 동로마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4차 십자군을 사주하였다.

  또한 십자군전쟁은 문화전쟁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즉,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였던 것이다.   비록 시작은 영토분쟁이었지만, 십자군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서유럽문화와 이슬람문화, 베네치아 상인과 동로마 사이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군전쟁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동서문화 교류의 새 장을 열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십자군에 참여한 많은 유럽인들은 이슬람문화에 익숙해졌으며, 본의 아니게 이슬람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하였다.   반대로 이슬람은 십자군을 통하여 유럽문화를 배웠다.   비록 십자군과 이슬람세력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문화만큼은 그런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교류되었다.   이 문화교류는 이후 유럽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상업이란 관점에서 십자군전쟁은 지중해무역의 최전성기를 가져온다.   당시 동양의 특산품은 모두 지중해무역을 통하여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그런데 십자군전쟁 이후 아시아에서 주로 사용하던 향신료의 소비가 유럽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지중해무역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이에 더하여 많은 동양의 물품들에 대한 소비도 증가하여 지중해무역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런 지중해무역의 발전은 지중해무역을 장악하였던 베네치아를 비롯한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럽 문화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르네상스의 밑바탕이 되었다.

  십자군전쟁은 단순히 별 이득도 없었던 전쟁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십자군전쟁을 통하여 발생된 유럽의 많은 변화 때문에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단어는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만약 십자군전쟁이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올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까.   또 십자군전쟁이 없었다면 향신료의 소비가 폭증하였을까.   향신료 소비의 폭증이 없었다면 대항해시대가 열렸을까.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보면 십자군전쟁이 서양사에서 갖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십자군전쟁은 로마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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