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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체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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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게바라는 질병치료보다 세계의 모순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해 안정된 의사직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과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 이 ‘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 번에 걸쳐 실시한 남미 전역 여행은 게바라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이 세계 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권이 미국 중앙정보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56년 7월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게바라는 같은 해 11월 80여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돼 거의 전멸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게바라, 카스트로 등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산맥에 숨어 게릴라활동을 벌이며 혁명군 을 모은다.    이들은 수만명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오다 58년 산타 클라라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는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59년 1월2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뒤 쿠바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 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그는 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 1년 뒤 게바라는 우루 과이의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게바라가 볼리 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해 게 바라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결국 게바라는 67년 10월8일 체포된 뒤 처형됐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생활은 다룬 다큐멘터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비아 일기>에 따르 면, 그는 “왜 인텔리 의사가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넣었느냐”는 볼리비아 여인의 질문에 간단히 “나의 이상을 위해”라고 답한다.   다큐멘터리는 또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게바라가 처형된 뒤 반쯤 뜬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추구한 이상의 실현을 죽어서나마 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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