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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영국- 미얀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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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미얀마 전쟁(Anglo-Burmese Wars)

미얀마로 하여금 벵골 만 지역에 대한 영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도록 만들어 미얀마의 지위를 약화시킨 3차례의 싸움(1824~26, 1852, 1885).

제1차 전쟁은 미얀마 서부 아라칸과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치타공 사이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1784~85년 미얀마가 아라칸 왕국을 무찌른 후 아라칸 피난민들은 북쪽의 영국 영토로 들어갔다. 이들은 벵골의 보호구역에서 군대를 조직해 국경을 다시 넘어 아라칸에 주둔중인 미얀마를 공략했다. 아라칸 애국지사들이 음로하웅 왕국의 주도(州都)를 점령했다. 미얀마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벵골 만을 넘어들어 왔다가 벵골 지역 지배자들의 공격을 받아 철수했다. 1823년 미얀마군이 다시 국경을 넘자 영국은 이에 무력으로 대응했다. 영국 원정대는 한 차례의 싸움도 없이 항로를 통해 양곤에 상륙했다(1824). 삼각주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를 위협함으로써 미얀마를 항복시키려 했던 영국의 의도는 미얀마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1825년 영국령 인도 군대는 북쪽으로 진격했다. 아바 남쪽 소규모 전투에서 미얀마 장군 반둘라가 전사했으며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제1차 전쟁은 얀다보 조약을 맺어(1826. 2) 종결되었다. 영국의 승리는 인도의 우수한 군수 물자가 우기가 2번이나 지나도록 계속된 전쟁을 뒷받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영국군이 지휘한 인도군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

25년간 평화가 지속된 후, 영국령 인도 정부는 해군 관리 코모도르 램버트를 랑군에 파견해 영국 상인들의 애로점을 조사하게 했다. 램버트가 미얀마 국왕 소유의 배를 나포하자 제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1852년 7월경까지 영국은 하(下)미얀마의 항구들을 점령하고, 수도로 진군하려 했다. 영국령 인도 군대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얀마 중부의 티크 삼림지대를 점령했다. 미얀마의 새로운 왕 민돈 민(1853~78 재위)은 영국군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영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북쪽으로 진격하지는 않았다. 양측이 모두 곤경에 처하자 싸움은 간단히 끝났다. 영국은 이제 하미얀마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미얀마 왕실의 공식적인 인정은 없었다. 민돈 민은 다시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할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행정개혁법안을 만들어 미얀마가 외국의 요구를 더 잘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그는 프랑스에서 온 사절단을 환대하고 프랑스에 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의 의심을 사게 되어, 영국과 미얀마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티바우 통치기간(1878~85)에 영국은 상(上)미얀마를 무시한 채 라오스·베트남·윈난[雲南] 지역 등에서의 프랑스의 움직임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뒤의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은 프랑스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얀마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흘루트다우(각료회의)가 프랑스의 총리에게 상호방위조약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영국의 하미얀마 티크 독점권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반면 흘루트다우는 봄베이미얀마무역회사가 퉁구로부터의 티크 반출량을 줄여서 보고한 것에 대해 벌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행위는 영국군을 자극했다. 1886년 1월 1일 영국은 상미얀마의 합병을 선언했다. 이로서 콘바웅 왕조가 무너지고 미얀마는 식민지가 되었다. 제3차 전쟁은 확대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그러나 영국 지배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은 이후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출처 :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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