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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세기의 연애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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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세기의 연애사건
 
‘지퍼게이트’ -  미국 현직 대통령 빌 클린턴과 백악관 직원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 사이의 스캔들을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에 빗대 풍자한 말이다. 교묘한 언변으로 잘못을 회피하던 클린턴은 스캔들보다도 이를 부인한 거짓말에 대해 여론의 심판을 받고 결국 자신의 과오를 국민과 세계 앞에 인정해야 했다.

헨리 8세(149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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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1491~1547)

권력자의 애정행각은 종종 자신의 운명과 더불어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로 이어지는 애정의 고리는 새로운 세계 역사를 만들었다. 고려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사랑하는 아내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지면서 좌절되었고, 가까운 20세기 초엽에도 영국 왕 에드워드 8세가 왕관을 던져버리고 미국의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함으로써 영연방은 조지 6세 - 엘리자베스 2세로 왕권이 이어지면서 새로운 역사가 쓰여졌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보다 약 500년 전에 있었던 영국(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스캔들은 지난 천 년간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캔들로 평가된다. 헨리 8세의 경우는 그의 애정행각에 따라 종교개혁이 유발되었고, 이 개혁이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6세 -  메리 1세 - 엘리자베스 1세로 이어지는 그의 자식 대에까지 이르러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헨리 8세의 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

1491년, 헨리 8세는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아서가 1502년 사망함으로써 그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곧 아서의 아내, 곧 형수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약혼한다. 1509년 왕위에 오른 그는 캐서린을 왕비로 맞이했다.

아라곤의 캐서린, 그녀는 스페인의 공동통치자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틸랴의 이사벨 1세의 막내딸이었다. 헨리 8세의 초기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탈리아 영토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대립했을 때, 그는 교황을 위해 장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를 도와 프랑스 원정에 나섰으며(1512∼1514) 원정기간 동안 캐서린은 섭정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1518년까지 캐서린은 아들 둘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메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산되거나 일찍 죽었다. 왕비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불만이 높아진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 싫증을 느끼고 캐서린의 시녀로 있던 앤 불린에게 접근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첫 결혼이 형수와의 결혼을 금하고 있는 성서(레위기)에 위배된 행위이므로 왕자와 공주들이 일찍 죽은 것은 신께서 이 결혼에 진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1527년 로마 교황청에 결혼 무효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왕의 이혼문제로 종교개혁 시작

교황청은 대개 이러한 이혼 소송에 대해 왕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좀 달랐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는데, 1519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승계한 카를 5세는 바로 캐서린의 조카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가문의 위신을 먼저 생각한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이모를 버리는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

헨리 8세는 로마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예전에 그는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반론을 제기하고 교황권에 깊이 충성을 다하여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1531년 캐서린과 이혼하고 이어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라는 내용의 ‘수장령’을 선포하였다.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통과시켜 국내에서의 모든 교황의 관할권을 말소시켰고, 1533년 5월에는 국왕이 새로이 대주교로 임명한 크랜머가 헨리 8세의 첫 결혼을 무효로 선언해 주었다.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함으로써 보복했지만 영국에서는 아무도 이에 신경쓰지 않았다. 국왕의 이혼문제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과 떨어져 섬나라로서의 독자성을 중시하던 잉글랜드의 정서에 비추어 그리 문제되지 않았고, 당시 유럽 대륙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던 종교개혁의 바람에도 어느 정도 잘 맞았던 것이다.


비운의 왕비들 - 이혼 둘, 참형 둘, 사별 둘

1527년부터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이혼을 추진했지만 교황의 반대로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성사와 더불어 1533년 1월, 그는 앤 불린과 결혼했다. 같은 해 9월에 공주 엘리자베스가 태어난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앤 불린에게 마음이 점차 멀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앤 불린이 낳은 아들이 사산되자 1536년, 왕은 그녀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 참수하고 만다.

앤 불린에 이어 세 번째로 헨리 8세의 왕비가 되었던 여인 제인 시모어. 1537년, 그녀는 헨리 8세가 열망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출산하던 중에 사망한다.

3년 후, 헨리 8세는 클레브스 공작의 누이인 앤과 결혼하지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즉시 이혼한다. 다시 선택한 그의 다섯 번째 왕비는 앤의 시녀로 있던 스무 살의 캐서린 하워드. 1년 남짓한 세월 동안 헨리 8세와 왕비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캐서린 하워드의 결혼 전 추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 후에도 예전 애인들과의 교제를 이어오다가 1542년 참수형을 당한다.

1543년, 여섯 번째 왕비가 된 사람은 조용하고 순종적인 캐서린 파였다. 캐서린 파는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었다. 캐서린 파는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함으로써 세 번째로 과부가 되기까지 왕에게 정신적인 안정과 적절한 조언을 제공했다. 그녀는 왕의 사후, 과거의 청혼자였던 시모어 경과 곧 결혼했으나 첫딸을 낳은 직후 죽었다.


자식 대에 이어진 종교개혁

헨리 8세 사후, 그의 후계자는 헨리가 평소 그렇게 갈망하던 적자(嫡子)인 에드워드 6세다. 생모인 제인 시모어는 전술한 바와 같이 그를 낳다가 죽었다.

유명한 동화 「왕자와 거지」의 소재가 된 ‘왕자’ 에드워드는 10세의 소년왕으로 등극했다. 허약 체질의 어린 왕은 섭정에게 정치를 맡겨 직접 정치에 나선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는 국교도로서 부왕의 뜻을 이어 신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예배통일법과 일반기도서를 제정하였다.

1533년, 16세로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누이이자 헨리 8세의 장녀인 메리에게 돌아갔다. 독실한 카톨릭 교도였던 메리 1세는 그 어머니가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어머니와의 이혼을 계기로 시작한 종교개혁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즉위 이듬해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한 메리는 구교의 부활에 주력하였다. 헨리 8세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소수 카톨릭 세력이 희생당했다면, 이제 메리 여왕에게서 시작된 반(反)종교개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메리 1세는 많은 신교도들을 처형함으로써 ‘피투성이 메리’라고 불리게 된다.

1558년, 메리 1세가 죽고 25세의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촉발했던 앤 불린의 딸이다. 그녀는 메리 여왕과는 반대로 독실한 국교도였고, 부왕 헨리 8세의 뜻을 이어나갔다. 메리 1세가 폐지했던 수장령과 통일령을 부활시켜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자로 만들었고, 전 국민에게 국교회의 의식을 지키게 했다. 

엘리자베스1세는 즉위 초기에 타협적인 자세로 카톨릭과 청교도들을 대했으므로 메리 여왕 시대와 같은 잔혹한 피 흘림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570년, 교황 피우스 5세가 여왕을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파문시키면서 영국 내의 카톨릭 교도들에게 오히려 위기가 닥쳐왔다. ‘여왕은 이미 영국 정규의 군주가 아니며 영국민은 어떤 정치적 복종을 강요받을 필요가 없다’는 교황의 선언으로 영국의 카톨릭 교도들은 여왕을 대적하는 매국노로 규정된 것이다. 이에 카톨릭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이나 여왕에게 비협력적으로 보이는 청교도들은 메리 시대에 버금가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억압 정책에 대한 비판은 탁월한 정치 감각을 발휘한 ‘처녀 여왕’의 인기에 압도된다. 성공적인 내치(內治)와 더불어 대외적으로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등 영국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룬 엘리자베스 1세는 지난 천년간 등장했던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엘리자베스는 1세는 ‘영국과 결혼했다’는 자기 선언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603년 노쇠하여 죽었고, 대영제국의 번영과 더불어 성공회는 영국 통치하의 식민지 확대에 따라 세계로 전파되었다. 

헨리 8세의 이혼문제에서 비롯된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순수한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개혁이 아니었고, 또 헨리 8세 자신이 카톨릭 의식을 좋아했으므로 성공회는 예배 의식이 가장 카톨릭과 흡사한 개신교이기도 하다. 카톨릭적 의식과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혼재해 있으므로 성공회를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간 형태라고도 보는 이들도 있다. 최근 들어 종교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성공회의 이런 중간 성격은 오히려 각광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킨 다혈질의 헨리 8세, 그에게 참수 당한 비운의 왕비 앤 불린의 사랑은 불과 수년 만에 덧없이 끝났다.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영국의 종교 개혁을 이루어내고, 오늘날 전세계 7천만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성공회를 탄생시킨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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