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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사해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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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사본의 어제와 오늘



이스라엘 관광국제공


2000년 전, 예루살렘 2차 성전 시대 말에 일단의 반체제인사들이 사해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남긴 문서가 1947년 베드윈 목동의 손에 의해 발견되어 골동품 상인들의 손을 거쳐 성서학자들, 회교도들,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세계가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사해 사본이 발견된 지 50여 년이 지나서 이 위대한 유산의 내용이 거의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고 사해문서의 메시지가 해석을 기다리고 있다.

50년 전, 3번째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려는 때에 사해 북서쪽 해안의 여러 장소에서 아주 오래된 고대 문서들이 이 곳 저 곳에서 발견되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되는 그저 그런 골동품의 하나라고 여겼지만 결국은 20세기 고고학 발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드러났다.

신비스럽고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 이 문서들은 약 800여 개의 다양한 문서들로 이루어졌으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통해 가장 의미있는 문서들로써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고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던 2차 성전 시대 때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밝혀졌다.

서기 70년 경은 유대교와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시대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앞두고 유대 국가는 서로 다른 몇가지 분파로 갈라져 있었다. 각기 서로 다른 주장과 신념을 지니면서 서로 다른 달력의 채용, 사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과 차이, 종교법에 대한 해석과 실천등에 걸쳐 많은 논란을 겪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각 분파는 일반대중에 대한 영향력과 유대 세계에서의 부와 권력을 위한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을 무대로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유명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성직자들은 로마군과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파괴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교(Judaism)의 기초를 전승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종파들은 로마 제국의 잔인한 말살 정책에 따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 시대의 유산은 유대교 일부와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2차 성전 시대의 히브리어 기록이 전혀 없었다. 이 시대의 교과서적인 문헌은 마카베후서 2권과 조세프스 플라비우스 역사 기록, 그리고 신약성서로서, 원본은 그리스어로 씌여진 것이다. 히브리어 원전은 성전이 무너진 약 130여 년이 지난 후에 편집된 미시나(Mishna)로서 랍비 유대교의 시각을 전해주고 있다.

1947년 어느날 이 모든 상황이 돌변하였다. 티미레 출신의 유목민 베드윈 양치기가 유대사막에 속하는 사해 주변의 동굴에서 히브리어 고대 두루마리 문서가 담겨진 항아리를 발견하였다. 곧 이 문서들은 2차 성전 시대에 씌여졌으며 다양한 문서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성경사본들, 지혜, 문학, 그리고 독특한 유대종파의 신앙과 규칙에 관한 문서들이 사해문서들에 포함되어 있다. 이 발견과 관련된 일화들은 신비로운 사건들로 치장되었지만 실상은 단순한 우연으로 양치기 소년이 길을 잃은염소를 찾기 위해 동굴에 들어갔다가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을 도화선으로 사해 사막 주변에서 새로운 보물을 찾으려는 노력이 유행처럼 번졌고, 베드윈, 골동품 상인들, 고고학자들, 심지어는 평범한 청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수색에 참가하였다.

대체적으로 누구보다도 베드윈들이 많은 수확을 거두었는데 오늘날까지 발견된 대부분의 발견들은 베드윈 손에 의한 것이다.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발견된 처음 3개의 두루마리 문서는 칸도(Kando, Khalil Iskamder Shahin)라는 베들레헴 상인의 손에 들어갔다. 만일 칸도씨가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고 웃으면서 낡은 가죽더미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칸도씨는 내용을 확인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눈치채고 사해 주변에서 사해 문서추가 발견을 위한 수색에 들어선다. 당시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중이어서 철수중인 영국군과 요르단 군부대, 이스라엘 군대, 팔레스타인 군대등이 혼란스럽게 섞여있었고 단지 유대사막을 삶의 보금자리로 하는 베드윈들만이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칸도씨는 자기 친구와 베드윈들을 처음 두루마리 성경이 발견된 동굴로 보냈고 이후 동굴속의 보물을 고스란히 손에 넣게 되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골동품 상인이 되었다. 그 동굴에서 발견된 7개의 완전한 두루마리 성경은 오늘날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 성서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처음 3개는 1947년 히브리어 대학교에 엘리에저 수케니 교수에 의해 구입되었고 추가로 발견된 4개는 교수의 아들인 이갈 야딘 교수에 의해 몇년 후 구입되었다. 야딘 교수는 시리아 정교 주교로부터 미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끝나면서 동굴 지역은 요르단 왕국의 통치아래 놓여졌으며 요르단 당국은 두루마리 사본을 아주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이는 사해사본 연구에 있어서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해문서 연구에 쌍벽을 이루던 학자들은 당시 요르단 정부 박물관장이었던 영국군 장교 출신 하딩(Gerald Lankaster Harding)씨와 블란서 도미니꼬 수도회 신부이며 예루살렘 성경연구소 에꼴 비블리끄(Ecole Biblique)원장이었던 드보(Roland de Vaux)신부였다.
주변의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요르단 군은 처음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주위로 탐사대를 파견하였다. 하딩씨와 드보 신부는 사해사본이 발견된 장소로 고고학 발굴팀을 인도하고 나타났으며 72개의 두루마리 사본의 파편들을 발견하였는데 아주 중요한 것들이다.
하딩씨와 드보 신부는 동굴에서 1km 떨어진 곳에 폐허를 발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장소는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으로 불리우며 아랍어로 돌무더기 폐허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딩씨와 드보 신부는 그 동굴과 관련된 유일한 고고학 장소로
이 곳을 지목했으며 사해 문서와 이 장소가 연관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쿰란 발굴로
한창 바쁜 도중에 그들은 이 곳이 수도원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두루마리 사본을
만들던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흥분하게 되었다. 같은 시간에 베드윈들은 몹시 바쁘게 움직였다. 쿰란 남쪽으로 몇 km 떨어진 므라밧 와디 계곡에서 가파른 절벽위 몇 개 동굴을 찾아내고 그 곳에서 2세기 경 활동했던 바르코크바(Bar Kochba)시대의 파피루소 서한들을 발견하였다. 새로운 문서들이 발견되자 이들은 곧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하딩씨와 드보 신부는 새로운 문서들의 보고를 찾기 시작했다.

쿰란 발굴을 즉시 중지하고 새로운 동굴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지치지 않는 베드윈들은 쿰란 주위에서 제 2 동굴을 찾아냈고 이 소식을 들은 유럽 고고학자들은 다시 쿰란으로 돌아와 주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으며 결국 사해문서를 담고 있는 동굴 3번을 찾아냈다. 이 동굴에서는 구리 두루마리 성경의 일부로 밝혀진 두 개의 금속조각을 발견했다. 구리 두루마리 성경이 공개되자 목록이 나타났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금은 보화와 제사에 쓰이던 그릇들과 기구들이 감추어진 72개 장소의 목록인 것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본을 해독하고 보물을 찾으려는 노력은 종교인들과 고고학자들간의 새로운 유행병을 불러일으켰으나 현재까지 단 하나도 발견된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발견을 위한 노력은 계속 되고 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쿰란을 떠나자 베드윈들은 다시 쿰란으로 돌아와 쿰란 주위의 절벽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쿰란에서 수십미터 떨어진 곳에서 무너진 동굴의 흔적을 발견하고 베드윈 3명이 그 장소를 파고 들어갔다.

동굴 4호로 알려진 이 곳은 바로 쿰란의 도서관이었다. 1952년 초에 일단의 베드윈들이 드보 신부의 예루살렘 사무소에 두루마리 성경파편 덩어리가 담긴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드보 신부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더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성경파편을 조사하면서 드보 신부는 새로운 문서들의 발견을 깨닫고 하딩씨와 연락하여 쿰란에 경찰대를 파견하였다. 베드윈들이 열심히 동굴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고 장소를 확인한 후 드보 신부는 에꼴 비브리끄에 소장 학자들을 파견하여 발굴을 지휘하였다. 수백개의 두루마리 사본을 그 장소에 있는 베드윈으로부터 압수하였으나 이미 15000개의 파편들은 베드윈 손에 흘러들어간 후였다. 시장에 돌아다니는 엄청난 양의 파편들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생겼고 하딩씨와 드보 신부는 베드윈들로부터 이들을 구입하기 위한 자금을 구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 도움을 요청했다. 더러 도움이 오긴 했으나 턱없이 모자란 가운데 요르단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하기로 하고 베드윈들로부터 파편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동굴 4번에서 발견된 문서들을 팔레스타인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하였는데 지금은 이 곳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록펠러 박물관이다. 이 때부터 약 4년 동안 베드윈들은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나들며 유대사막과 나할헤버 계곡에서 추가로 서간문들과 두루마리 사본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소식들을 접하자 이스라엘에서는 탐사팀이 요하난 아하로니 교수의 지휘아래 구성되어 나할쩨림 계곡등에서 탐사를 진행하였고 이갈야딘 교수의 지휘아래 전면적인 유대사막 탐사가 이루어졌으며 나할헤버 주위에서 바르코크바 시대의 동굴들을 발견했으나 이미 베드윈들이 다녀간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1956년 마지막 동굴 11번이 베드윈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이 동굴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완벽한 두루마리 사본으로 결국 야딘 교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나자 야딘 교수는 이스라엘 수상인 레비 에쉬콜의 특별 자문관으로 일하면서 특별한 허락을 받고 칸도씨를 비밀리에 만났다. 처음에 칸도씨는 다른 사해문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부인했지만 결국 칸도씨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이끌고 그의 자택으로 가서 침실에 있는 책장을 밀어내고 바닥에서 타일을 뜯어낸 후 플라스틱 봉투에 쌓여있는 아름다운 사해사본을 내놓았다.

역사상 발견된 가장 아름다운 유적으로 7m 길이의 사해사본이 두루마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사본은 메시아가 오기 전 어떻게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성전사본(Temple Scroll)이라 불리운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칸도씨에게 보상금으로 10만 5천 달러를 지불하였다.

모두 11개의 동굴이 발견되고 록펠러 박물관에 모여진 사본 파편들이 4만개에 이르게 되자 이제 숙제는 고고학자들과 성서학자들의 몫이 되었다. 드보 신부는 처음에 외부의 도움을 사양했지만 곧 에꼴 비블리끄에서 혼자 할 수 없는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명한 록펠러의 재정적인 후원을 바탕으로 다른 여섯 군데의 전문가들이 참여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고대 히브리어 전문가들이 참여했으나 곧 관련 학계에서도 참여가 이루어졌다. 옥스퍼드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 독일, 프랑스 등에서 석학들이 모였는데 2명의 개신교 학자들과 5명의 가톨릭 학자들, 그리고 무신론자 6명으로, 이들은 모여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유대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동예루살렘에서 드보신부의 지휘아래 고립된 상태에서 밤낮으로 수년간 오로지 연구에만 매달렸다.

첫번째 임무는 마치 퍼즐처럼 흩어진 조각들을 제자리에 찾아 끼워넣는 아주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긴 테이블 두 개를 놓고 한쪽에는 파편들을 한쪽에는 성경원본을 놓고 비교하여 맞추는 작업이었다.
두번째는 성경이 아닌 아람어와 히브리어로 씌여진 파편들을 재정리하는 것이었다. 모아진 파편들을 색깔과 글자형태와 크기, 띄어쓰기 형태 등에 따라 구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점차 530개의 서로 다른 두루마리 사본들로 분류되었고 이러한 고통스럽고 지리한 작업은 참가자들간 경쟁과 긴장속에서 쉬지않고 진행되었다.

3년후인 1956년 모든 분류가 완성되었으나 당시 국제 정세에 따라 하딩씨가 요르단
정부로부터 파면당했고 록펠러씨가 자금 지원을 중지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사본들은 안전을 위해 암만으로 운반되었으며 이전에 학자들은 출판 권리를 서로 나누어 갖는 합의를 하였다. 미국 학자들은 성경 관련 사본을, 일부는 고대 히브리어 사본을,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외의 문서들을 맡도록 합의하고 한 사람은 메시아 사상에 관한 출판권리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 후에는 각자 맡은 부분에서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길을 통해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있지만 연구는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작업량이 워낙 많았으며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질시도 많았는데 초기에는 연구 발표가 비교적 활발했지만 차츰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많은 부분들이 사장된 상태가 계속되었다. 더더군다나 이러한 자료들은 외부 학자들에게는 철저하게 비공개 되고있었다.

1967년 6일전쟁이 끝나면서 동예루살렘과 사해사본은 이스라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출판의 의무는 이스라엘 손에 있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문화재관리국이 사해사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으나 출판권리와 관련한 사항은 아주 미묘한 것이었다. 드보 신부는 편집장의 위치를 계속 지니고 있었고 1971년 드보 신부가 돌아가시자 베노(Pierre Benoit)신부가 편집장의 위치를 승계했으며 1984년 스트르그넬(Strugnell)이 이어받았다.

옥스퍼드의 드라이버 교수 제자인 스트르그넬은 초기부터 이 작업에 참가했으며 요르단 정부가 팔레스타인 영토 포기 선언을 하자 곧바로 동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출판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연구진을 20명으로 늘렸는데 추가된 대부분은 이스라엘 학자들이었다. 사해문서 연구의 새로운 세대는 출판에 대한 필요성을 처음 세대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야딘 교수는 1967년 성전 사본(Temple Scroll)에 대해 권리를 가진 후, 10년이 지난 1977년 국제 학술대회에서 처음 히브리어로 발표했으며 6년이 더 지난후에야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1985년 사해문서는 아이젠만 교수가 미국 얼브라이트 고고학 연구소로부터 스트르그넬 박사에게 사해사본 파편 일부를 확인하고자 부탁하러 예루살렘에 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물론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 다른 통로를 통해서 4년동안이나 계속 애를 쓰던 아이젠만은 이 문제를 유명한 학술지 BAR(Biblical Archaeological Revison)에 40년 동안 사해문서 연구팀의 활동을 비판하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BAR편집장인 생크 교수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이스라엘 문화재관리국에 해명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정치계, 각종 학계, 일반 여론, 그리고 언론에 이런 내용을 알리면서 부당성을 호소하였다. 더군다나 바티칸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의혹의 사해문서의 내용(Dead Scrolls Deception)”이라는 책에서 베이전트와 레이(Michael Baigent, Richard Leigh)에 의해 제기되자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한편 아이젠만 교수는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사해문서의 복사본을 받기 시작했고 이 곳 저 곳에서 보내져 온 사진들을 모으니 모두 1700개가 되었다. 이들로부터 받은 조각들을 퍼즐처럼 재구성하여 사해문서의 내용을 재구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아메리칸 대학교 안전금고로 보내 보관하였다. 1990년 6월 캘리포니아 산마리노 헌팅턴 도서관에서 이 문서를 자격있는 학자들에게 공개하면서 사해사본의 독점시대 폐막을 선언했다. 1990년 9월 22일 일요일 뉴욕타임즈 일간신문 헤드라인 뉴스가 이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스라엘 문화재관리국과 사해문서 연구팀이 반격에 나섰지만 결국 1991년 사해사본의 사진들이 모든 학자들에게 공개되었다. 스트르그넬 교수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히브리대학교의 임마누엘 토브 교수가 이어받았다. 사해사본에 대한 전쟁은 끝이 났으나 이제 사해사본 내용에 대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사해사본 내용

1세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무렵 이스라엘 사회는 여러 분파로 갈리어져 있었다.
크고 작은 20여 개의 분파들이 있었지만 당시 역사가인 조세프스와 필리니의 기록에 따르면 바리세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에쎄네파 라고 불리우는 자그마한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세프스에 따르면 에쎄네파는 약 4000명 정도로 도시와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과 독특한 복장과 행동, 그리고 특별한 행동 수칙을 지키고 있어 당시 역사가나 학자들에게 아주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다고 한다. 에쎄네파에 대한 학술적인 기록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기록에 나타난다.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카이로에서 구입한 문서 가운데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 중세시대 씌여진 “다마스커스 문서”라고 불리우는 기록을 보면 이 에쎄네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후에 사해 동굴 4번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해문서들은 에쎄네파의 공동체 생활이 조세프스, 필로, 그리고 필리니가 기록한 내용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사해 서쪽 해안지대에 엔게디 지역까지 바로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동일한 지역이 이들의 활동지역으로 확인된다. 학자들간에 다소 이견이 있는 부분도 있는데 사두가이파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던가 로마에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던가 로마가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있다는 주장들도 있다. 심지어는 쿰란에서 생활한 에쎄네 공동체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문서간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조차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학계의 시각은 에쎄네파가 쿰란의 주인이었고 주위에서 발견된 사해문서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서기 68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군을 파견하여 유대인 반란을 진압할 때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쩌면 멀리에서 다가오는 로마 군대를 보며 에쎄네 사람들은 주위 동굴에 가장 신성한 성경과 문서들을 황급히 감추고 어디론가 떠나 다시는 쿰란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에쎄네 공동체의 시작과 쿰란 수도원 건설은 발견된 문서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97년 발견된 다마스커스 문서에도 확인할 수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2번째 두루마리 문서는 115줄의 문서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달력을
보여주며 날짜 계산 방식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2C 중엽
하시모니아 왕국시대를 그 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크로스(Frank Cross)는 에쎄네파의 족보를 마카베오 시대의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인 요나탄 마카베오 때의 제사장에서 시작된다고 처음 주장한 학자이다.

수세기동안의 페르시아와 그리이스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유대사회의
최고 권력으로 활동했으며 거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그 후손이 세습적으로 대제사장을 승계했는데 기원전 175년 오니야스 3세와 제이손 두 형제가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당시 그리이스 셀류시드
제국 황제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많은 뇌물을 제공하고 제이손이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서 제사장은 외국인인 황제가 임명하는 새로운 전통이 생겼으며 제이손이 대제사장이 된지 4년 후에 유대의 부유한 가문이 안티오쿠스를 설득하여 대제상직을 사독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 임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메네라우스가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 사회는 소요와 반란으로 뒤덮이게 되었고 제이손의 세력과 메네라우스 세력과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분은 외부 세력인 안티오쿠스의 개입을 유발시켰으며 이에 대항한 독립전쟁이 바로 마카베오 운동이었다.
마카베오가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하자 왕과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바로 에쎄네파의 출현의 무대였으며 새로 확립된 예루살렘 성전 주도 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세력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로운 선생님(Righteous Teacher)”의 지도아래 모여 종파를 이루고 쿰란에 그들만을 위한 장소를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쎄네파의 공동체 회원들은 엄한 규율과 공동식사, 그리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실천했으며 메시아의 임박을 믿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 )”라고 불리우는 정치적인 메시아(다윗의 후손)와 종교적인 메시아(아론의 후손)로 인식했다. 또한 메시아의 도래는 빛의 아들들(에쎄네파)이 어둠의 자식들에 대해 벌이는 40년의 성전을 치른 후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수도원 공동체의 생활은 율법의 엄정한 준수와 정결례의 강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해 동쪽에서 아침해를 맞는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대추야자 재배등 여러가지 작업으로 이어졌고 오정에는 종교적인 정결침례예절과 공동 식사를 한 후 다시 오후 작업을 하는 생활을 하였다. 밤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율법과 지혜문학을 연구하였다.


에쎄네 공동체는 자원자(volunteer)만 받아들었다. 자원자들은 감독(overseer)들의 심사에 따라 악의 그림자보다 빛의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 확인되도록 했으며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라 판단되었다. 선한자로 받아들여지는 즉시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 의탁하였다. 공동체 생활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매일매일 식사는 육류와 와인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동체는 독특한 태양력을 사용했는데 성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일년을 364일로 나누었고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고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달을 30일씩 12달로 나누었으며 매 4분기마다 하루씩을 더했다. 일년은 정확하게 52주로 나뉘게 된다. 새해는 언제나 수요일날 시작했으며 태양과 달, 별들이 창조된 날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 절기들은 명확히 표기하고 있는데 유월절은 첫 달에 14번째 날, 칠칠절은 3번째 달에 14번째 날과 같은 방식이다. 이에 따라서 유대인 절기는 언제나 같은 요일에 시작된다. 유월절은 수요일, 칠칠절은 일요일, 속죄일은 금요일, 장막절은 수요일......

쿰란의 한 해는 29시간 48분 40초 만큼 태양 공전주기보다 짧기 때문에 에쎄네파는 매 5-6년 마다 달력에 일주일을 더 삽입해서 태양주기를 맞추었다. 이런 달력 시스템때문에 유대교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전과 달랐다. 이로써 사해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칸사제가 의로운 선생을 가장 신성한 날인 속죄일에 공격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있게 된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비교적 젊었으며 예루살렘 사제 집안의 후예들로써 예루살렘 권위를 부정하고 유대인 전반의 지지를 얻기위해 고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요세프스 플라비우스가 기록한 전형적인 에쎄네파 회원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외가쪽으로 하시모니아 왕과 대제사장들의 친척인 16세 소년이 집을 떠나 유대사막에서 떠돌다가 바누스라는 사람을 만나 에쎄네 공동체에 얼마간 머문다. 3년 후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리세이파에 합류했다. 조세프스가 기록한 이 일화는 아마 많은 쿰란 공동체 회원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오랜 시간 일하며 공동 식사를 하고 엄격한 규칙을 따르며 밤시간의 1/3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닐 것이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만이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아마 좀 덜 엄격한 에쎄네 공동체로 옮겨가기도 했을 것이다. 쿰란 주위에는 공동묘지 세개와 1200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똑같은 형태와 비석도 없이 줄줄이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50개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남자였다. 한 무덤만 65세로 판명되었고 다른 모든 무덤들은 30세 이하에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떻게 긴박한 말세를 기다리는 종파가 200년 이상 계속될 수 있었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해준다.

서기 66년 대반란이 일어났을 때 말세가 온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 참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란은 패배로 끝났다. 성전은 파괴됐으며 쿰란의 공동체 본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파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의 종말이라고 믿었고 “유대인 고대사”의 저자인 조세프스 플라비우스는 스스로 유대인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지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세프스는 잘못 알았던 것이다. 얌니아(현재 야브네)는 이스라엘 남부 해안의 자그마한 마을인데 로마의 파괴로부터 생존한 몇몇의 랍비들이 성전이 없는 유대교의 기초를 이곳에서 새로 마련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시작인 것이다. 랍비들은 분파주의와 갈등이 유대인 역사에 가장 큰 아픔인 성전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보고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유대인의 일체성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게 되었다. 분파적 요소를 지닌 종파들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비록 사상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 되었지만 비교적 미미한 것이었다. 성전이 사라지자 에쎄네파의 영향력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에쎄네파의 랍비 유대이즘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들이 있다. 이는 규칙적인 기도인데 에쎄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리스도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성서에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또는 산상수훈의 선교 내용과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된다. 사해사본은 구약성경외에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단어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이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의로운 신(sidqat el)”, “율법의 일들(ma’aseh torah)”, “하느님의 교회(gehal el)”, “빛의 아들들(bene’or)”이라는 표현등이다. 또다른 에쎄네파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이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그리이스어 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overseer라는 에쎄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에쎄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에서 더 비약하는 학자들도 있다. 의로운 선생님을 예수님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야고보(James)를 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세례 요한을 칭한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아직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에쎄네파의 초기 그리스도교 영향력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으며 아마 적어도 한 때는 쿰란에 몸 담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적어도 에쎄네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죽자 그의 제자 중 일부는 갈릴리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비교 내용이 나타난다. 유사한 토론들을 통해서 에쎄네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지적능력은 입회의 조건이었다. 도서관에서 오랜동안 공부하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연구했다. 그러나 쿰란 사람들은 당시 대부분 유대인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개방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 반대로 엄격한 이분법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사람들로써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세력이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쿰란 공동체에 관한 저서들은 그들의 인물들에 대해서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지원자였던 Honio, 감독관이었던 엘리에저르, 그리고 감독관이 규칙 위반자 리스트를 만들면서 적어놓았던 이름들인 요하나, 하나니아, 시게온 등의 이름들만이 파편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들이 바로 사해 북서쪽 해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수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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