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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뿌린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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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뿌린 희망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재단 / 조기숙 / 2010-06-03)


대통령님,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님이 우리 곁을 떠난 후 삶의 의욕도 삶의 의미도 잃어버린 우리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피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접고 조용히 잠적하고 싶은 충동도 수시로 느꼈습니다.

하지만 님에게 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표적수사가 자행되면서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님의 큰 희생이 우리 모두를 깨어나게 했습니다. 힘을 합쳐 한 전 총리님을 지켜냈습니다. 그 고난의 행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천군만마의 도움을 얻을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스스로를 던져 뿌린 희망의 씨앗

6월 2일, 님을 잃은 후 처음으로 전국동시 지방선거를 치렀습니다. 님의 참모이자 정치적 동지들이 ‘사람사는 세상’의 가치를 내걸고 대거 출마했습니다. 언론은 이들을 ‘노무현 사단’이라 불렀습니다. 결과는 조금씩 달랐지만 분명하게 확인한 사실이 있습니다. 님이 스스로를 던져 뿌린 희망의 씨앗이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만하고 독선적인 현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노무현 사단’을 의미 있는 대안으로 선택했습니다. 대통령의 오랜 동지, ‘우광재, 좌희정’이 당당히 40대 나이에 도지사에 당선되었습니다. ‘리틀 노무현’이라 불리던 김두관 후보는 불모의 땅, 경남에서 무소속으로 도지사에 당선되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님의 정치적 아들, 유시민 후보는 신생정당의 조직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경기도에서 분루를 삼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유 후보가 예상을 깨고 진보진영 단일후보가 되면서 이번 지방선거에 활력을 불어넣고 젊은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낸 진보진영 승리의 일등공신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명숙 후보의 선전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한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정말 아깝게 졌을지 몰라도, 민심을 거역한 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70대 노인을 겁박하여 만들어낸 검찰의 터무니없는 조작수사를 이겨내고 치른 선거였기에 한 후보의 강인함과 불굴의 의지에 더욱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한 전 총리를 높이 평가했던 님의 안목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장에도 님의 참모들이 여럿 당선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부패하고 썩은 지방권력을 정말 오랜만에 교체했습니다.  언론의 90% 이상이 장악돼 국민의 눈을 가린 가운데 얻은 결과여서 더욱 소중합니다.


진보진영의 연대와 협력

이번 선거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역대 지방선거에 비해 월등히 높아진 투표율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의 역대 투표율은 선진국은 물론이고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를 이룬 나라들과 비교해도 비정상적으로 낮았습니다.

그래서 님은 “민주주의와 진보의 미래는 국민이 생각하는 만큼 간다”고 말씀하셨지요. 이렇게 투표율이 높아진 건 깨어있는 시민이 그 만큼 많아졌다는 증거입니다. 님이 떠난 후, 얼마나 많은 시민이 충격과 눈물 속에서 깨어났는지 모릅니다. 님의 희생으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님이 그립고 죄송한 마음에 가슴 속에 피눈물이 흐릅니다.

두 번째 의미는 다시 ‘노풍’이 불었다는 겁니다. 현 정부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센 북풍몰이 속에서도 젊은층이 다시 노풍을 만들어냈습니다.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 이후 한국 선거에서 세대간 투표격차는 한동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을 가슴 뛰게 만들고 투표장으로 이끄는 요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이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였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참여정부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뤄진 선거였다면 진보진영이 그렇게 참패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진보진영 스스로가 싸워보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읍소하면서 한번만 봐달라고 구걸한 선거였습니다. 감동과 결기 대신에 배신과 자기부정이 난무한 선거였습니다.

하지만 님의 동지들이 선거의 전면에 나서면서 당당히 참여정부의 업적을 가지고 다투게 되면서 다시 바람이 불었습니다. 노풍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임을 증명했습니다. 젊은층이 대거 투표에 참여하면서 진보진영이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님의 간절한 소망대로 진보진영이 연대하고 협력했다는 것입니다. 님은 생전에 진보진영의 분열을 늘 가슴아파 하셨지요. 님이 2002년 당선의 기적을 만들어내면서 진보진영은 자만했고 우리의 힘을 턱없이 높이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님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진보진영은 스스로 힘의 한계를 냉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거결과 많은 지역에서 공동정부가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연대와 협력을 통해 반드시 성공사례를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진짜 권력은 시민에게 있다”

사실 이번 선거결과의 징후는 님을 추모하는 콘서트를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이미 직감한 바 있습니다. 전국에 조용히 들불이 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대한 초목이 아니라 작은 들풀이 스스로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들풀이 타서 재가 되고 거름이 되면 동토의 땅에서도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납니다. 님이 당신의 전부를 던져 뿌린 씨앗이 민초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발아하게 된 것입니다. 아~, 님은 가셨지만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님의 꿈은 이제 막 첫 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선거결과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국민을 겁박하고 역사를 퇴행시킨 현 정부입니다. 이들의 자책골로 득점을 한 진보진영은 자만해서도 방심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겸허한 자세로 민심을 섬기며 지속가능한 진보의 발전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님의 당부를 잊지 않겠습니다. 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바람으로 정치가 좌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진보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을 놓기 위해 님은 정치와 거리를 두고자 하셨습니다. 진짜 권력은 시민에게 있다고 하셨지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정치가 움직이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정 님의 뜻을 잇는 길입니다.

님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열심히 살겠습니다.

대통령님, 오늘은 한 번만 크게 웃어주세요.


조기숙 /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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