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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일본의 역사 왜곡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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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왜곡
- 일본제국주의와 부활 행진곡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얼마 전 일본에서 장관 두 사람이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 말 때문에 잇달아 장관 자리를 내놓았다.   법무장관 나가노와 환경장관 사쿠라이가 그들이다.   나가노는 일본이 "유럽제국주의 손아귀에서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일본군이 중국 남경을 점령하면서 중국사람 30만을 학살했다는 이른바 남경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쿠라이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 두 사람은 아시아 여러 나라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서자 장관직을 물러났지만 자기네가 내뱉은 말을 시원스럽게 거두어들이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1988년 국토청장관 오쿠노가 "중일전쟁은 일본의 계획적인 침략이 아니라 노구교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전쟁에서 일본인도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그 몇 해 전에는 후지오 문부성장관이 "일본의 식민 지배가 조선과 조선인에게 유익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한바탕 외교 마찰을 일으킨 일도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때마다 장관을 바꾸는 정도의 형식적인 조치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금세기 벽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50여 년 동안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침략전쟁과 야만행위는 아직도 '역사의 창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아시아 여려 나라 국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현저하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나라들은 일본이 자기네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사과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본 국민, 특히 일본 지배층과 정치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조선강점과 중국침략에 대한 권력자들의 언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나가노와 사쿠라이 장관의 역사관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1950년대에 수상을 지낸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뒤로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장담했으며, 1970년대 초반 수상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는 국회연설 도중에 "일본이 조선에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심지어는 1965년 박정희 정권과 벌인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수석대표였던 다카스키 신이치란 사람은 이런 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일본이 조선을 20년쯤 더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일본더러 식민 지배를 사죄하라고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면서 좋은 일을 했다.    창씨개명도 다 조선사람을 일본사람과 똑같이 대접하려는 정책이었다.   잘 해보려고 했는데 전쟁에 저서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공장과 가옥을 다 그냥 두고 왔다. 지금 한국에는 산에 나무 한 그루가 없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에서 떨어져 나간 탓이다.

1982년 한국 대학생의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킨 교과서 왜곡사건은 일본 정부 관리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일본 문부성은 교과서를 심사하면서 조선침략은 '조선진출'로, 3.1운동을 '폭동'으로 조선말 사용 금지를 '조선어, 일본어 공용'으로, 창씨 개명 강요를 '권장'이라고 서술하도록 필자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조상들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범죄행위를 청소년들이 알지 못하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게다가 1982년 수상이 된 나카소네는 명치유신 이후 수많은 침략전쟁에서 죽은 일본제국 군인을 '모신' 정국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수상이 정국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은 과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판국에 각료들의 망언까지 잇따르자 중국, 북한, 한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정부가 외교경로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했고 한국 대학생들은 여러 도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당시 '만년집권당'이던 자민당 젊은 의원들은 엉뚱하게도 소위 '국가기본문제동지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유 없는 외국의 비난과 그에 영합하는 정당의 각성"을 요구하고 "부당한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여 국가주권을 지키자"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비난한 정당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저질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일본이 재무장을 갖추는 데 반대한 사회당을 말한다.   물론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과 사회당은 이러한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범죄를 깨끗이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우익단체들은 오히려 확성기를 들고 동경시내를 휘젓고 다니면서 "아시아 각국의 부당한 비난과 내정간섭을 규탄"했다.

일본 집권층의 일그러진 역사의식과 잇단 망언은 일본이 벌인 아시아 침략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다.   한때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나라가 세계에서 손꼽는 경제대국이 되어 자기네가 저지른 죄를 부정하는 것은 기회만 닿으면 또다시 그런 짓을 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범의 나라 일본

일본은 침략자 속성을 타고난 나라이다.   섬나라 일본은 외국 침략을 받은 일이 거의 없는 나라지만 여러 섬으로 나뉜 탓으로 1868년 명치유신 이전까지는 자기네끼리 쉴 사이 없이 전쟁을 벌였다.   각 지역에 할거한 봉건영주들은 농민을 지배하고 다른 지방을 정복하기 위해 무장한 가신 집단을 길렀으니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요 이 사무라이 집단의 무기가 바로 유명한 '일본도'이다.   그리고 영주를 중심으로 사무라이 집단을 결합한 중세 봉건체제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흔히 일본정신이라고 하는 '무사도'였다.  무사도는 12세기 무렵에 나타난 유교사상과 결합하면서 '충성, 희생, 신의 결백, 명예'를 숭상하는 일본 특유의 호전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가장 즐겨 보는 고전연극 '가부키'는 거의 다 주군을 섬기는 사무라이의 충성, 복수, 희생을 소재로 삼는다. 연극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도 전쟁에 진 영주를 따라 집단 할복 자살하거나 평생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주군의 원수를 갚은 '용맹한 사무라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무사도는 근대적인 중앙집권정부를 만든 명치유신과 더불어 총과 대포와 비행기를 가진 '천황의 군대'를 지배하는 중심이념이 되었고 나아가 모든 국민이 따라야 할 '일본정신'으로까지 승격되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덕천막부가 무너지면서 무사들은 칼을 빼앗겼다.   하지만 무사도는 자급자족 봉건경제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경제제도인 자본주의에 접목되었다.   봉건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유럽과 미국에 문을 연 후 급속한 산업발전을 이룬 일본에서는, 신흥 부르주아지가 봉건권력을 타도한 서유럽과는 달리 민주주의가 싹틀 수 없었다.   그래서 시민 정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천년 역사를 이어 온' 천황제가 들어앉았다.   의회가 있기는 했지만 아무 실권도 없었다.   그래서 '천황폐하의 군대'는 칼 대신 신식무기를 들고 봉건영주 대신 '대 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대신 다른 나라를 침략하러 달려나갔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인 이유는 독일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 정치권력은 천황을 받드는 군부 관료집단이 움켜쥐었고 경제력은 이들의 비호를 받는 극소수 재벌집단이 독점하였다.   일본 국민은 민주주의 기초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본가들은 내수시장이 작고 원료가 부족한터라 군부의 침략전쟁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그 비용을 지워했다.   이렇게 해서 왕을 신으로 숭배한 일본국민은 군부 관료와 재벌 집단이 이끄는 대로 패전이 임박할 때가지 공장과 전선에서 열성을 바쳐 일했다.   패전은 일본 국민에게 일종의 혁명과도 같았다. 현역 군인으로서 수상직을 맡았던 도오죠 히데키를 비롯한 고위 장성과 관료들은 "사무라이 정신이 무색하게도" 자살하지 않고 전쟁범죄자 혐의로 미군에게 체포당하였다.

신이라고 하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 방송에 나와 자기도 남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고백했다.   백전백승한다던 대 일본제국의 영광은 어디에도 없었고 군대와 재벌은 해체되었다.   산업시설은 미군 비행기가 쏟아 부은 폭탄에 잿더미가 되었고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도시와 원자폭탄이 가져다 준 끔찍한 공포뿐이었다.   연합군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고 일본이 앞으로 군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못을 박았다.   낡은 '대 일본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빠졌다.

그런데 2차대전이 끝나기 무섭게 들이닥친 동서냉전이 역사의 흐름을 다시 한번 뒤집어 놓았다.   이른바 '전후 역코스'라는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 군대가 패주를 거듭하고 동유럽에서 잇달아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 세력이 이끄는 파업과 혁명운동이 불붙었다.  한반도 북쪽 절반은 소련 군대가 점령했다.   미국 정부는 이대로 가면 일본마저 붉게 물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일본 사회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되살리지 않는 한 '동아시아 반공기지'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1948년 말 열린 동경 전범재판에서 도오죠히데키를 비롯한 전범 7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6명에게 종신형을 내리는 것으로 전범 처벌을 매듭지었다.   천황제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점령군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첫 수상으로 취임한 사람은 전쟁 당시 외무관료로 일한 요시다 시게루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연합군은 전쟁범죄자를 모두 사면시켰다.  쫓겨났던 전범 혐의자 1만여 명이 모두 공직에 복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치안,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재빠르게 장악했다.   해체되었던 재벌기업도 되살아났다.   1954년 경찰예비대가 자위대로 바뀌면서부터는 일본도 실질적으로 군대를 부유하게 되었다.   미국은 사회주의체제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 국수주의자,  파시스트, 천황제 광신자들을 동맹군으로 선택하여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제국주의자들에게 정치권력을 넘겨 준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다시 군사대국으로 만들어 보려는 군국주의적 보수세력의 음모가 싹텄다.

똑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일과 비교해 보면 일본은 정말이지 전범들의 나라라고 할 만하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죄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분할 점령당하였다가 냉전이 시작되면서 동서독으로 갈라졌다.   나치 협력자들까지 철저히 숙청한 동독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연합군이 점령한 서독에서도 주요 전범들은 엄한 처벌을 받았다.   유태인 학살을 비롯한 범죄행위의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주요 전범이 아닌 협력자들은 나중에 사면을 받았지만 그런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잡거나 사회 지도층으로 복귀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의 전쟁범죄를 대하는 독일 정부의 태도는 일본 정부와 전혀 다르다.  독일은 주변 국가와 유태인들에게 입힌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성의껏 배상했고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학생들이 지겨워할 만큼' 교육을 한다.  수상이나 대통령 등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저지른 범죄는 아니지만 우리가 속한 민족공동체가 저지른 일이니만큼 젊은이들도 그것을 자기 문제로 내면화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얼마 전 대통령이 된 로만 헤르초크가 취임연설에서 "그 당시는 전쟁통이었고 스탈린은 그보다 더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나치 만행을 합리화하는 극우파의 주장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자는 다른 사람의 죄와 자기 죄를 비교할 권리가 없다"고 한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이다.

일본 정부 각료들은 남경대학살을 조작한 사건이라고 말하지만 독일 대통령과 장관들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되자 몸소 보러 가는 것은 물론이요 교사들이게 "학생들이 되도록 많이 보도록 권장하라"는 담화를 발표한다.   우익단체들이 전쟁범죄를 사과하는 데 반대한다며 확성기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한 우익단체가 이런 주장을 하면 처벌하도록 한 독일 형법이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소송을 냈을 때 일이다.   연방헌법재판소는 1994년 봄 이 형법조항이 합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유태인 학살은 전범재판, 생존자 증언, 각종 문서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실로 판명된 만큼 이러한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독일에 사는 유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장은 헌법이 보장하는 의사표현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독일이 일본 못지 않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일본과 달리 이웃나라와 잘 지내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국내의 극우파를 단호하게 처벌하기 때문이다.


군사대국 일본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경제 재건에 성공한 일본은 그후 생산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군국주의자들의 영향력도 점점 커졌다.   자민당 정권은 1960년대에 명치유신 백주년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열고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상징인 정국신사를 가꾸는 데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였으며 국민들을 세뇌하기 위해 지국주의시대의 유물인 일본 왕의 '교육칙어'를 부활시키려고 했고 냉전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느라 열을 올렸다.   이 모든 일이 다 국민들 사이에 군사대국 일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군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를 가장 숨김없이 드러낸 사건은 1970년 10월 일어난 청년작가 미시마 유키오 자살사건이다.   그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부활'과 '일본정신 회복'을 절규하며 매스컴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도로 '사무라이식 할복자살'을 감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엄연한 문명국가요 아시아에서 으뜸가는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치고는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일본 언론은 한편으로는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흥분에 들떠 찬사를 퍼부음으로써 미시마를 순국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일본 보수파는 이런 소동을 틈타 사무라이 정신과 '대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를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연극, 영화, 소설 등 예술 분야에서도 사무라이와 전쟁을 미화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시마 유키오는 군국주의자, 복고주의자, 극우 민족주의자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온 세계 문명사회와 아시아 이웃나라 국민들은 이런 소름끼치는 짓을 감행하는 일본 보수세력에 대해 새롭게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실제로 군사대국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이후 오년마다 방위비 예산을 곱절로 늘렸고 1984년 이후 몇 년간은 금기로 되어 있던 국민 총생산 대비 1%상항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위대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국민총생산의 1%라면 별 것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일본 경제 규모가 워낙 큰 탓으로 1992년의 경우 액수로는 무려 4조 5천억 엔이 넘는다.  우리 나라 일반회계 예산 총액과 맞먹는 규모인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언제든지 군수산업으로 전화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과 전자, 통신, 반도체산업의 선진국이며 세계 최대의 플로토늄 처리 능력을 가진 핵강국이다.  

일본 군사력은 이미 남북한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하며 자위대는 이름만 바꾸면 언제든 침략군대가 될 수 있다.    국제정세도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부추기는 쪽으로 가고 있다.   오랜 경기침체로 세계 경제 주도권을 상실한 미국은 방위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본이 동아시아를 '책임'져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미군은 일본 자위대와 수시로 합동훈련을 벌이면서 전쟁이 터지면 대한해협을 봉쇄하고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펼 준비를 이미 갖추어 놓았다.   냉전시대 미일 군사동맹의 목적은 소련과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걷는 요즈음에는 일본이 중심이 된 지역안보체제가 자리잡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경계하는 주변국가 국민들의 저항 때문에 그러한 집단안보체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옛날처럼 주변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선 일본 국민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은 과거 다른 나라를 침략한 가해자이지만 그들 자신도 전쟁의 쓰라림을 톡톡히 맛보았다.   게다가 전후에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주리며 자란 젊은 세대는 그 어떤 사상이나 평화애호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평화로운 생활이 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재무장이나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   1960년대 일본 사회에 회오리를 일으켰던 학생운동은 '전공투'와 '적군파'의 테러활동을 끝으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모든 정치이념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로지 인생을 즐기는 데만 골몰한다.   전쟁세대는 태평양전쟁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리고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와 정치 무관심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이나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은 군국주의자들의 초조감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들이 사무라이 정신과 '위대한 대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은 국민 여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라나는 세대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제국주의시대 일본역사를 아름답게 꾸미려 하고 예전에는 소련과 중국을, 그리고 지금은 북한과 중국을 가상적으로 삼아 대결의식을 고취하는 선동을 일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젊은이들은 대부분 할아버지 세대 일본 군대가 조선과 중국에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군사대국 일본'을 꿈꾸는 군국주의자들은 반쯤은 성공하고 반쯤은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끔 생전에 꿈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에 속에 든 말을 불쑥 내뱉곤 한다.   예컨대 1958년 제1차 군비증강 5개년 계획을 추진한 기시 노부스케 수상은 "일본 자위권을 남한과 대만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일찍이 1급 전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심사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1988년 5월에 조선과 중국 침략을 정당화한 말 때문에 장관직을 사임한 오쿠노 역시 제국주의시대 사상탄압으로 악명을 날린 특별고등경찰 출신이었다.

요즈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다시없이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다.   집권 자민당의 여러 파벌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가운데 자민--사회 양당제도가 무너져 그 동안 자위대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던 사회당이 군소정당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당이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만들어 무라야마 위원장이 수상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아예 당 노선을 바꾸어 자위대가 평화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만년 야당이기는 하지만 자민당 극우파의 군국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저지한 사회당이 군소정당 가운데 하나가 됨으로써 일본 정치권은 그야말로 보수정당 일색으로 변한데다 그 사회당마저 크게 우경화해 버린 것이다.   만약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정치대국, 군사대국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우익 정당들이 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다면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못난 한국 정부

그런데 문제는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을 얕보고 각료들이 망언을 내뱉는 데는 못난 짓을 한 우리 정부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해방 후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처벌 받기는 커녕 오히려 반공투사임을 자처하면서 미군정에 빌붙어 정치권력을 차지한 것이 문제의 출발이었다.  게다가 합법정부를 짓밟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단돈 3억 달러에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몽땅 넘겨주었다.   박정희 자신의 일본군 장교 출신이고 당시 정치, 경제, 군사, 치안, 교육 등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한 자들이 최소한 일제와 협력했거나 앞장서서 동족을 탄압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을 모욕한 다음에야 남에게 모욕을 받는다"는 말처럼 대한민국은 스스로를 모욕했다.   그래서 전범 경력을 가진 일본 정부 고위관리와 자위대 수뇌부, 자민당 보수정객, 재벌, 민간인 군국주의자들이 하나같이 이른바 '친한파'를 자처했고 한국 정부는 이런 자들과 함께 '한일 신시대'와 '우호협력관계'를 쌓았다.

친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그러진 한국 현대사'는 오늘날까지 그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982년 일본의 조선강점을 정당화한 후지오 망언이 나오자 독립유공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을 때 일이다.   시위를 한 사람들은 모두 종로경찰서로 잡혀갔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인 신수범 선생이 끼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일로 끌려갔던 바로 그 경찰서에 60년만에 다시 잡혀 간 것이다.   신수범 선생은 끝내 민족정기가 바로 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도 수십 명이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1987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관장한 국무총리도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지금은 워낙 나이가 많이 들어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앉기는 했지만 1980년대 후반가지만 해도 일본 육사나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천황폐하의 군대'에서 복무했거나 조선총독부의 관료를 지낸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스스로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이 대일 배상청구권을 넘겨주었다는 이유로 정신대 할머니나 징용 징병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상황인데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일본 왕 히로히토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저지른 일본의 범죄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죽자 조문사절을 보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의 아들 아키히토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에 대해 "통석의 염을 금할 길 없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안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이 말을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일본 왕의 사과를 받았노라고 자랑했다.

그나마 사과 비슷한말을 한 것은 1993년 11월 6일 김영삼 대통령과 경주에서 만난 호소카와 수상이다.   자민당을 탈당한 후 군소정당을 모아 연립정권을 세운 호소카와는 조선어 사용금지나 창씨개명, 종군위안부 등 몇 가지 사실을 들어가며 "가해자로서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호소카와 개인 의견일 뿐이어서 그 직후 앞서 말한 나가노와 사쿠라이 장관이 그와는 전혀 다른 망언을 늘어놓았고 일본 보수파는 당장 호소카와를 욕하고 나섰다.   남의 집에 쳐들어와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간 소행을 생각하면 이런 정도는 사과다운 사과라고 하기 어렵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일단 호소카와의 사과를 반겼다.

그러나 호소카와는 몇 달 못 가 수상자리를 내놓았고 우여곡절 끝에 사회당과 자민당 잔여 세력이 연립정부를 세웠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이나 일본 전쟁범죄를 사죄하지 않는 자민당을 비판한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가 수상이 되었는데도 그 역시 시원한 '사과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우익단체의 가두선전은 더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수상이 솔직한 사죄를 한다 할 지라도 일본국내의 우익단체를 방관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 사죄를 진심으로 볼 수 없는 터이다.   이런 판국에 마치 호소카와의 말 한마디로 "한일 시대의 기초가 마련" 된 양 흡족해 한 다면 그 또한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광복 50년이 다 된 지금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1인당 국민소득이 8천달러가 넘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엄청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는 방위비를 아끼기 위해 일본 자위대의 전투력과 작전범위를 확대하라고 부추긴다.   미군 철수는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그럴경우 미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울 세력은 일본 자위대 밖에 없다.   만약 남북한이 평화공존과 교류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을 계속한다면 "황실의 안전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를 불러들인 이씨 왕조처럼 "불한의 위협에 대항하여" 일본 자위대를 불러들이자는 주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일본의 장래는 물론 일본 국민에게 달려 있다.   전쟁범죄의 진상을 아는 기성 세대가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서 새 세대가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교과서를 왜곡한다면, 그 결과 일본 젊은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면, 일본의 침략으로 모진 고통을 겪은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은 영원히 일본의 사과를 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록 경제력이 크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유럽과 아메리카가 모두 제나름으로 경제공동체와 지역안보공동체를 만드는 오늘날 아시아 이웃나라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해서야 일본의 미래가 밝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비해야 하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이 군사대국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장 먼저 피 흘릴 나라는 바로 우리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되 우리 사회 구석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일본제국주의 찌꺼기, 다시 말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관료주의, 일제경찰의 유산인 고문과 인권 유린, 친일 친미 사대주의, 분별없는 왜색문화 모방과 일본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등을 깨끗이 씻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지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정부 각료들이 시도 때도 없는 망언과 역사왜곡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값비싼 교훈이다.   호소카와 수상의 사과를 받고 우리 나라 외무부 당국자들은 "과거 역사문제가 앞으로는 외교현안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이 활기 찬 경제발전으로 자신감을 찾을수록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문제는 더욱 중요한 외교현안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외무부 당국자들의 '장님 행세'에 현혹 당한다면 또 한번 '경술국치'를 불러들일 뿐이다.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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