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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꺼리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역사 - 청교도와 필그림스 조상들의 실상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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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와 필그림스 조상들의 실상

1. 미국인의 최초의 조상은 천민출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첫 항해한 이후 많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잇따라 남미를 탐험하였고 양 국가는 1백 년 동안 남미 경영에 주력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오랫동안 북미대륙을 탐험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1539년에 이르러서야 스페인의 페르난데스 데 소토(Fernandez De Soto)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북미 대륙의 플로리다를 탐사했다. 이어서 그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발견하였다. 스페인왕 펠리페 2세(Fellipe II)가 신대륙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동안 영국은 북쪽에 스코트랜드에 사촌 누이동생인 메리 (Queen Mary) 여왕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Queen Elizabeth) 여왕과의 왕위 쟁탈전과 국내정치에 전념하느라 신대륙 경영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영국은 뒤늦게 1570년 해적 출신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처음으로 서인도 제도를 항해하였다.

  해적왕 드레이크는 1578년에 신대륙에 상륙하는 데 성공은 했으나 정착기지를 설치하는데 실패하였다. 그후 드레이크 해적선장은 스페인 사람들이 서인도제도의 원주민들로부터 빼앗은 각종 재물을 싣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려던 배를 습격하여 약탈하는 해적행위로 거둬드린 재물을 당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선물했다. 이어 드레이크는 여왕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5척의 작은 배에 166 명의 선원을 태우고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여 남아메리카의 마젤란해협을 지나 남아메리카의 태평양의 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면서 지금의 칠레와 페루에 거주하는 스페인 주민들의 도시를 습격하여 많은 재물을 약탈했다. 그는 스페인 거주민들의 성당을 습격하여 성당의 제단을 장식하는 황금 접시와 황금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등 수 없이 많은 재물을 약탈하여 모항인 프리머스항구(Plymouth Harbor)로 돌아왔다.

 그는 약탈한 재물을 여왕에게 받쳤다. 여왕은 드레이크에게 귀족의 작위를 내리고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들의 업적을 축하해주었다. 이어 영국 법학원(法學院)에서는 그에게 명예회원의 자격을 수여했다. 드레이크가 신천지에서 많은 보물을 가지고 귀국한 것에 자극을 받은 많은 영국인들이 이 미지의 땅을 동경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메이플라워호라든가 필그림스들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인들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하는 해적행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영국인들도 기독교 국가인데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던 집기들과 십자가까지 훔쳐온 해적선장에게 도둑질을 잘 했다고 영국의 귀족의 작위를 주는 영국여왕이나 법의 준수를 생명으로 알아야할 법률가들이 그에게 영국법학원의 회원으로 추대하는 영국법학원의 법률가들의 가치기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남의 재물에 탐이나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강도가 하루아침에 귀족이 되는 당시 영국 왕실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지금 영국을 이끌어나가는 지도층 엘리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세기에 미국이 저질렀던 수많은 범죄행위를 가름할 수 있고, 오늘날 미국인들의 의식구조와 미래에 또다시 반복하게 될 지도 모를 미국인들의 범죄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인 것이다. 지금 미국을 이끌어 가는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앵글로색슨족이어서 그들의 유전인자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이상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는 별다른 큰 변화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Sir Humphrey Gilbert)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축복을 받으면서 재차 출항하여 뉴펀드랜드(New Foundland)에 상륙하여 정착가능지역을 탐사한 후 귀국 길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허리케인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신대륙을 탐험한 사람은 험프리 길버트의 이복동생인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이었다. 그는 배들을 북미대륙에 파견하여 탐사결과 오늘의 노스캐롤라이나 해안에 위치한 로아노크 섬(Roanok)에 정착기지를 설치하고 107 명의 이주민들을 보냈으나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공격으로 보급선을 제때에 보낼 수 없어 1590년에야 보급선을 보냈으나 107 명의 개척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행방이나 그들의 안위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 사건이후 영국은 신대륙 개척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 I세가 즉위하자 본격적으로 개척사업에 열을 올렸다. 1606년 신대륙을 개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런던주식회사(London Company)와 플리머스회사(Plymouth Company)가 창립되었으나 런던주식회사만이 오래 명맥을 유지했다. 영국사람들은 매일같이 여왕의 모병관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난한 집안의 청년들을 군인으로 강제로 징집하여 전쟁판으로 내몰고, 소작인들은 농장주에게 받치는 토지 경작료 외에 국가에서 받아 가는 10분의 1 세금, 부랑자들이 배회하면서 서민들을 괴롭히는 일, 치안판사의 스파이들이 설쳐대는 속에 빈민굴 투성이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실업자들과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는 젊은이들은 런던회사와 프리머스 회사가 신대륙 개척단에서 일할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신대륙 개척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국이 식민정책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것은 부분적으로 영국에 당면하고 있던 사회경제문제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늦게 신대륙 개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계속되는 종교분쟁과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음모와 전쟁 때문이었다. 영국은 기후가 채소나 곡물재배보다는 양이나 소를 양육하는 가축영농에 훨씬 적합하였고 또한 수익도 높았다. 따라서 돈 많은 지주들이 농경지를 양이나 소를 방목하여 키울 수 있게 목초지로 바꾸었다.

 농사에 종사하던 소작 농민들은 농촌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된 신세로 도시로 몰려들어 직업을 구하지 못해 부랑자가 되거나 범죄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대륙에는 임자도 없고 아무도 가꾸지 않는 끝도 없는 땅이 널려 있다는 소문이 이들을 매료시켜 신대륙으로 이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영국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된 실상인 것이다. 영국의 신대륙 이민역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미국 측 역사책에 신대륙으로 이주한 것은 종교박해로부터 해방되어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대륙을 건설하려는 개척자들은 1606년 크리스마스 무렵 3 척의 배에 143 명의 개척 이민을 싣고 런던을 떠났다. 그들은 이듬해 5월 버지니아 해안의 체사피크 만 (Chesapeake Bay)으로 진입하여 삼나무가 우거진 원시림과 빨간 날개를 가진 새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는 해안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체사피크 만으로 흘러나오는 그 강을 영국왕의 이름을 따서 제임스(James) 강이라고 명명하고 그 자리에 제임스타운을 설립하고 제임스타운에 최초로 토마스 데일 경(Sir Thomas Dale)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신대륙 개척에 나섰다. 1619년 7월에 그 동안 여러 경로로 신대륙에 정착한 수천 명의 영국인들은 서로간의 이해득실로 갖가지 분쟁이 시작되자 이를 방지하고 질서를 유지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1619년 7월 여러 정착지 대표들이 모여 버지니아 하원(The House of Burgesses)를 구성했다.

 이 회의가 신대륙에서 구성된 첫 번째 공식 의회가 되었다. 이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필그림스들이 신대륙에 도착하기 1년 전에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신대륙에 이주하여 벌써 버지니아 하원의원이라는 주민 대표자회의가 구성되었을 정도로 이주사업이 번창하고 있었던 것을 봐도 미국 역사책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필그림스들이 처음으로 신대륙을 개척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또한 1619년 처음으로 20 여명의 흑인이 신대륙에 도착했다.

 이들 흑인들이 비록 계약 노동자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미합중국이 될 지역에 노예가 되는 첫 케이스가 되었다. 그러나 계약흑인들은 1620년 신대륙에 착륙하여 백인들처럼 자신의 토지를 개간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였으나 후에 백인들에 의해 강제로 흑인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버지니아에 정착한 백인들은 이 때부터 수입된 흑인들을 이용하여 농지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이 신대륙에 최초로 정착한 최초의 미국인의 선조라고 주장했던 <필그림스>(Pilgrims)를 신대륙 <최초의 이주자>(First Comers)라고 불렀던 미국인들의 선조들 보다 40여 년 전인 1562년 영국의 항해사 존 호킨스(John Hawkins)가 신대륙에 처음으로 흑인노예 무역을 시작한 후 1600년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인들의 노동자들과 함께 20명의 흑인노예들이 신대륙에 상륙했다.

 흑인들이 필그림스 들보다 20년에서 40년이나 먼저 신대륙에 수백 명의 흑인 노예들이 상륙하여 노예생활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 논리대로 말한다면 이 흑인들이 미국인들이 주장하는 필그림스 선조들 보다 먼저 신대륙에 처음으로 상륙한 미국인들의 선조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국에서 기반을 다진 기득권 세력은 신대륙의 개척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단지 영국에 땅도 없고 직업도 없거나 생활이 궁핍하여 신대륙에서 땅을 소유하고 싶은 소작농들이 당시 변변치 못한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의 높은 격랑에 몇 개월씩이나 위험을 감수하고 바다를 건너 천신만고 끝에 신대륙에 왔던 것이다.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 (저자 홍윤서)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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