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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역사 - 1812년 전쟁 (캐나다 침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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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전쟁 (캐나다 침략전쟁)

미국이 캐나다와 전쟁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그것도 한 두 달이 아니라 1812년 7월부터 1815년 1월까지 무려 2년 반이나 끌었던 전쟁이었다.   그것도 수 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켰고 서로 상대 국가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국가수반의 관저를 비롯하여 한 공공기관의 건물들을 방화하는 등 비교적 규모가 컸던 전쟁이었다.

미국이 1776년 7월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812년 6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제4대 미국 대통령 당시 켄터키 주 출신의 호전적인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Henry Clay)를 비롯하여 캐나다를 정복하려는 땅에 굶주린 전쟁광들의 선동으로 윌리엄(William Hull) 장군이 이끄는 12,000 명의 육군 병력으로 캐나다(Canada)의 영국군의 진지를 공격해 들어갔다. 영국과 캐나다의 연합군대는 테쿰세(Tekumse)라는 젊은 인디언 추장의 지원에 힘입어 미군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전쟁은 미국 동부지역 전체로 확산되고 우세한 영국의 해군 함대는 미국의 주요항구를 봉쇄하는 작전으로 미국을 압박해 들어갔다.   당시 영국이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결전을 벌이느라 온 국력을 동원하여 유럽에서 싸우고 있어 대서양 넘어 신대륙까지 군대를 지원해줄 여력이 없었다.   미국은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신대륙에 군대를 지원해줄 여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이번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 전쟁에 성공했다면 캐나다는 역사상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북미 대륙 전체가 미합중국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 다음해 4월 미 육군 부대는 캐나다의 토론토(Toronto)를 함락시키고 정부청사와 관공서 등 공공건물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본국으로부터 지원 병력을 얻지 못하여 영국군은 월등히 우세한 해군함대로 미국 동부해안을 봉쇄하는 것 말고는 미국  군대와 조우하여 어려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자 1814년 4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가 영국에 패배하고 영불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은 오래 끌 것으로 예상했던 영불전쟁이 의외로 빨리 끝나자 미국으로서는 큰 낭패가 되었다.   영국 본국에서는 프랑스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던 14,000 명의 병력을 즉시 신대륙 전장에 투입시켜 전세를 일시에 만회하였다.   8월 본국으로부터 대대적인 증원을 받은 영국군은 거의 미국의 저항을 받지 않고 대군을 몰아 워싱톤 D.C.로 진군하여 미국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영국군도 미국 군대가 토론토를 모두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으로 지금의 미국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 Capitol Hill)과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白堊館 : White House)을 방화하고 정부청사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든 각료와 상하양원과 모든 관리들이 워싱톤 D.C.를 버리고 도망을 갔다.   영국군의 공격에 미국 매디슨(Madison) 대통령은 메릴랜드로(Maryland) 피신했다가 영국군이 볼티모어(Baltimore)를 공략하기 위해 수도를 철수하자 8월말 워싱톤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지금의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은 영국군 철수 후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캐나다로 진격해 들어간 미군은 토론토의 정부청사와 공공건물들을 방화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영국이 나폴레옹의 항복을 받아낸 후 즉시 나폴레옹과 싸웠던 14,000 명의 역전의 용사들을 포함한 대대적인 증원군을 신대륙으로 보내 미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영국 해군은 미군이 캐나다를 급습하여 토론토 등 전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와 공공건물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지금의 미국 국회의사당(國會議事堂: Capitol Hill)과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白堊館: White House) 을 방화하고 공공건물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미국의 국회의사당과 대통령의 관저인 백악관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공건물들이 불에 타고 있고 워싱톤시의 주민들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었던 광경을 상상하면 이번 뉴욕의 트레이드 센터 에 대한 자살테러사건을 능가한 대사건이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 국회의원들과 상당수의 사람들이 수도를 버리고 혼비백산하여 메릴랜드 주와 인근 다른 주로 도망을 갔고 한 동안 미국정부가 존재하지 않아 국가권력의 공백 현상이 일어나는 웃기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그런 창피한 역사도 가지고 있었다.   6개월 후에 영국군을 포토맥강에서 쫓아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들의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는 숨기고 영국이 미국의 항로를 방해하고 미국 선원들을 강제로 영국군에 징집시키는 것에 반발해서 일어난 분쟁이었던 것으로 후세의 사가들이 역사의 진실을 축소 왜곡했던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케네스 C. 데이비스가 이 사실을 폭로했고 필자 또한 이 사실을 다른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저술한 숨겨진 미국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확인했을 뿐 아니라 다른 문헌을 비롯하여하여 브리타니카(Encyclopedia of Britanica) 백과사전에서도 미국이 영토욕으로 1812년 전쟁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있음을 확인했다.

미국은 영국이 가장 취약할 때 캐나다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이 나폴레옹의 너무 일찍 영국에 항복하는 바람에 영국이 유럽에서 싸웠던 대병력을 증원함에 따라 영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이제 영국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싸운 역전의 용사들을 갖게 되었으나 전쟁이 광대한 지역으로 확산되면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져나갈 것을 우려하여 미국과 벨지움(Belgiem)의 한 마을인 겐트에서 몇 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1814년 12월 24일 겐트조약(Gehnt Treaty)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 전쟁도 미영 양측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수많은 인명만 희생시킨 낭비적인 전쟁이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불과 36년 밖에 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지 8년 후인 1821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미국의 총인구가 불과 9백만 명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끝간데 없이 넓게 펼쳐진 광대한 땅도 부족해서 캐나다의 땅마저 소유하고자 하는 땅에 미친 전쟁광들이 벌였던 전쟁이었다.


 "전쟁과 학살 부끄러운 미국" (저자 홍윤서)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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