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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교황제도카톨릭의 교황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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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교황제도
- 교황제의 성립과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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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사건 후 미국 ABC 방송은 9월 22일, 미국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앙아시아 순방기간인 22∼27일까지 보복공격을 개시하지 않을 것으로 보도했다. 이 예측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져 미국의 아프간 공습은 10월 7일에 시작되었다. 교황의 행보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전쟁시기를 조정할 정도로 위력을 가진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78년부터 재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0월 22일 취임 23주년을 a맞았다. 그는 취임 후 지난 9월 말까지 95차례 해외순방 길에 올라 종파간 화합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등 전임 교황들에 비해 매우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쳐왔다. 81세 고령에다 파킨슨병에 시달리면서도 교황은 해외 순방을 멈추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교황은 영토 0.44㎢, 인구 1천 명에 불과한 세계 최소국 바티칸 시국의 정치적 수장이지만, 전세계 10억 카톨릭 교도의 ‘아버지’(Holy Father)로 불리는 종교적 수장이다. 이런 특수한 지위로 인해 교황은 세계 어느 대통령보다도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외국을 방문할 때 최고 귀빈예우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교황의 연설 한 마디, 한 마디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정도다.

바티칸의 대주교는 “교황이 동서 베를린의 장벽을 붕괴시켰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교황 선출 이전, 폴란드에서 ‘카롤 요셉 보이티아’라는 이름의 대주교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했고 이로써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의 민주화가 진전되어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카톨릭 신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작년 3월에 교황을 방문하여 북한 방문을 제안한 것도 교황의 행보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고려한 포석이었다.

정치적인 문제 외에 최근 수십 년간 교황청에서 일관되게 추진해 온 정책은 종교연합운동이다. 카톨릭에서는 과거 천여 년간 “카톨릭 교회 외에는 절대로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1962년 소집되어 1965년에 폐회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유대교, 개신교와의 화해와 교회의 일치가 촉구되면서 종교간 화해, 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1986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초청을 받은 전세계 40여 종교의 지도자들이 아시시에 모여 교황 및 주교들과 함께 세계종교회의를 개최했다. 2차 세계종교회의는 새천년을 앞둔 1999년 10월, 바티칸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검은 법의를 입은 카톨릭 주교, 흰 터번을 쓴 모슬렘, 전통복장의 유대교 랍비, 황색 승복을 입은 불교 승려 등 수백 명의 종교인들이 나흘 동안 한데 어울려 세계 평화와 종교간 화해를 논했다.

유대교와 개신교, 그리스정교에 대한 잇단 사과와 화해, 이슬람과 불교에 대한 인정과 축복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정치적 영향력과 함께 종교적 영향력을 높여 나갔다. 현재 교황의 영향력을 완강히 거부하는 국가는 공산체제를 고수하는 중국, 북한 정도이다. 그러나 교황청은 13억 인구를 가진 중국과 손을 잡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는 중이다.

교황권의 시작

교황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카톨릭 교회측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고, 예수의 뜻에 따라 베드로의 계승자인 교황이 세워져 왔다고 주장해왔다. 즉, 신성불가침의 교황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뜻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반대 시각도 있다.

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겠다고 약속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고 초대교회에서 베드로는 사도들의 수장 격으로 회의에서의 의결권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개종 이후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로 알려졌다.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네로의 박해 때인 64∼67년 사이에 로마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졌다.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제국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2∼3세기 무렵부터 로마 교회는 타 지역의 교회에 대해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박해시대를 끝내고 313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었을 때, 로마 교회는 황실의 교회가 되어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 로마의 주교에게는 라테라노 궁전이 수여되었고, 곳곳에 화려한 교회 건물이 들어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에는 로마 주교가 황제의 그늘에 가려 교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세례도 받지 않은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는 등 황제의 권력이 교회를 장악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신도시가 건설되고 황제가 수도를 그곳으로 옮겨버리자 로마 교회는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 세력이 점점 강화되었다. 로마는 황제가 머무는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제외하고 서방 교회의 수위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을 비롯하여 서로마를 나누어 점령한 게르만 여러 왕국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교황권은 탄탄대로에 오른다.

8세기 자카리아(재위 741∼752)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이 시도한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승인함으로써 카롤링거 왕조의 개창에 협력했고, 피핀은 감사의 표시로 이탈리아 영토 일부를 교황령으로 헌납했다. 샤를마뉴 대제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씌우고 프랑크 왕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세력을 얻은 교황은 동로마에 예속되어 오던 관계를 단절하고 중세의 교권과 함께 세속권까지도 장악한다.

교황권의 절정과 몰락

역대 교황은 꾸준히 세속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해왔다. 대 그레고리 1세로 불리는 교황은 6세기 말, ‘보편적 총대주교’임을 주장하는 콘스탄티노플 주교에 대해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했다. 로마 주교의 명칭은 ‘베드로의 계승자’에서 베드로의 대리자(그레고리 7세), 더 나아가 ‘하느님의 대리자’(인노켄티우스 4세)까지 발전했다.

교황권이 황제권에 대해 우위를 점한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1077년 1월 벌어진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싸고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 7세와 대립하였다. 그레고리 7세는 황제를 파문에 처함으로써 신하들이 황제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에 당황한 황제는 교황이 잠시 머물고 있던 카노사 성으로 달려가 참회 복장을 입고 맨발로 3일간 성 앞에서 파문의 철회를 간청하였다.

교황이 파문조치를 철회하자 하인리히 4세는 정적들을 제거한 후 반격에 나섰다. 그는 대립교황을 세워 그레고리 7세를 몰아냈으나 이로써 교황권이 황제권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후 우르반 2세는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에서 해방하라”고 황제와 제후들에게 호소하며 십자군을 제창했다. 오른쪽 어깨 위에 십자 표식을 달고 출정하는 군인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교황의 특명이 내려졌다. 이후 200년 가량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교황이 서유럽의 진정한 수장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이르면 교황이 마음대로 황제를 옹립, 파문하고 왕들을 중재하는 수준에 이른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돌았듯이 교황권이 절정에 오른 때였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권이 세속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칙서를 반포하고 “모든 인간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 때부터 상황은 역전되어 교황권은 세속의 권력에 밀리기 시작한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에 의해 1303년, 보니파키우스 8세가 이단 혐의로 고발당한 채 쫓겨나 사망하고 1305년에 프랑스인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자 교황청은 필리프 4세의 뜻에 따라 아비뇽으로 옮겨진다. 교황권이 프랑스 국왕에게 종속당한 이 때를 사가(史家)들은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그레고리 11세 사후에는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선출되어 카톨릭 교회의 분열과 교황권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콘스탄츠공의회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분열은 일단 극복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사치와 화려함을 구가하던 교황권에 종교개혁이라는 치명타가 가해진다. 1517년 독일의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며 카톨릭 교회의 체제와 비리를 비난했고, 이어서 칼뱅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했다. 위기감을 느낀 교황청이 트리엔트공의회를 소집하여 카톨릭 교리를 재정비하며, 종교재판소를 두고 개신교도들에 대한 학살까지 자행하며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종교 전쟁을 벌이는 등 분투했지만 어느덧 유럽의 절반이 개신교 세력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신성 불가침으로 보이던 교황좌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루이 16세와 그 왕비가 단두대에 처형된 후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1798년 로마를 침공하여 로마 공화국을 세웠다. 교황 피우스 6세는 교황령을 잃고 퇴위되어 프랑스 그르노블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발랑스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1799). 이로써 교황권은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보였다.

이어서 교황에 선출된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 대관식에 참석하지만 축복기도를 했을 뿐, 예전처럼 황제에게 관을 씌워줄 수는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황제의 관을 쓰고 황후에게도 자신이 관을 씌워주었다. 나폴레옹 실각 후에도 교황의 재기는 쉽지 않았다. 1860년 이탈리아가 통일될 때, 교황령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교황권의 부흥과 현재

세속권을 완전히 잃은 교황은 이제 종교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교황 피우스 9세가 소집하여 1869년 개회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듬해에 “교황이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교황은 베드로에게 약속하는 무류성을 행사한다(즉, 교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뜻)”는 교황 무류성 교리를 의결함으로써 교황 절대주의를 내세웠다.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교황 베네딕트 15세는 중립을 선언했다. 1929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무솔리니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파시즘을 인정하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수도임을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바티칸의 주권을 보장받았다. 이 협정으로 바티칸 공화국은 이탈리아의 도움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독재자 무솔리니를 인정했다 하여 ‘파시스트 교황’이니 하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었다. 피우스 11세에 이어서 교황으로 선출된 피우스 12세는 2차대전 발발 후 철저히 침묵하고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1차대전 때 베네딕트 15세가 취한 조치와 다름없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교황의 침묵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고 교황이 나치의 공모자였다는 주장까지 나오자 교황청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나치에게 항의했더라면 나치가 보복조치로 유대인 학살에 더욱 박차를 가할까봐 망설였다고 해명했지만 대중을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보급은 교황을 대중적인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방송매체를 통해 교황은 세계의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고 전파는 교황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세계로 보냈다. 발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고 1965년에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기도 하였다. 1978년 선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거 어느 교황보다도 더욱 해외 순방에 나서며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세계에 보냈다. 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 정치적이고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9·11 테러 이후 교황은 “카톨릭 교회는 진정한 이슬람을 존경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990년대 말부터 ‘부처님 오신 날’마다 축하 메시지를 보내온 교황이 이번에는 이슬람권 끌어안기에 나선 것이다.

과거와 달리 세계 평화를 호소하고 종교간의 연합을 촉구하는 교황에 대하여 세계는 환영하고 있다.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도착하는 곳마다 입을 맞추고 많은 군중을 모았다. 그는 또한 각국 정치가, 종교 지도자들과 기꺼이 손을 잡고 우정과 협력을 강조했다. 비단 카톨릭 교도뿐 아니라 공산주의자 정치가도, 불교 지도자도 그와 반갑게 손을 잡았다. 그가 95차례, 128개국에 달하는 해외 순방에 나선 거리를 환산하면 지구를 30바퀴 가량 돈 셈. 10억 카톨릭 인구의 수장으로서 교황이 가지는 종교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지만, 교황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오늘날 종교 연합운동의 주축이 되어 세계종교 가운데 우위를 점하고 카톨릭 세력의 확산을 꾀하는 바티칸의 야심은 예전과 다를 바 없지만, 이를 이루는 데 있어 카톨릭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는 카톨릭 교리와 교황 지상주의, 그리고 과거 교황청의 비리와 과오를 청산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새로운 세기를 맞아 교황은 이 세 가지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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