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실마리 - 성직자 독신 제도의 유래와 배경
카톨릭과 불교의 성직자들은 왜 결혼하지 않을까?
만약 어떤 강력한 지구 전체의 통치자가 있어서 100년간 결혼 및 모든 성 관계를 엄금한다면? |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일뿐더러 인류를 유지시켜 온 고마운 본능이다. 물론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인간을 동물차원으로 끌어내리게 되겠지만, 그런 `짐승 같은` 인간은 소수이고 대다수 인류는 이런 욕구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인들의 조절 수위를 넘어서 아예 결혼을 금지해 버림으로써 성(性)을 억압 또는 초월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부, 수녀와 같은 카톨릭 성직자 및 수도자와 `비구`, `비구니`로 불리는 불교의 승려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종교에서는 한결같이 독신을 `성결(聖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독신 교리는 어디에서 유래했고 어떻게 정착한 것일까? 이 글에서는 성직자 및 수도자들의 독신 생활이 제도화되어 있는 카톨릭과 불교를 중심으로 독신 제도의 사회적, 사상적인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신 교리의 정착 과정
불교의 경우, 출가를 해야 수행할 수 있다는 견해가 초기부터 지배적이었다. 인도 가비라 국의 왕자로 탄생한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는 자신이 출가하기 직전에 아들이 태어나자 아들의 이름을 `장애(障碍)`라는 뜻으로 `라훌라(Rahula)`라고 지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을 뒤로하고 29세에 출가한 석가모니는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나서 고향에 돌아왔고 이때 외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석가모니 자신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었듯,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수행을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최초로 출가한 불교도는 녹야원(鹿野園)에서 석가모니에게 최초의 설법을 들은 다섯 비구들이며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독신 생활을 하며 수행에 나섰다.
불교 경전에서는 출가 수행을 장려했다. 한 사람이 출가하면 그의 일가 친척 구족이 천상에서 태어난다는 말도 있다. 불교에서 출가한 남자는 비구, 출가한 여인은 비구니라고 하며, 비구와 비구니가 되어야 정식 승려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같은 불교국가 사이에도 승려가 독신 생활을 하는 곳과 하지 않는 곳이 있다. 일본의 경우, 승려는 거의 대처승(帶妻僧: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승려)이며, 세속을 초월한다기보다는 개신교의 목사처럼 현실 속에서 신자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동남아 지역의 불교국가 가운데에도 대처승이 대부분인 나라가 많다.
우리 나라 불교의 경우, 일제시대에 총독부의 강요로 대처승이 늘었으나 광복 후 대처승이 배척되면서 비구승과 대처승간의 갈등과 반목을 낳기도 했다. 1954년, 분쟁이 불거지면서 법정 투쟁으로 비화되었는데, 결국 비구승 측이 정부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한국 불교계에서는 태고종이나 진각종 같은 일부 교파에서만 대처승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카톨릭에서의 독신 제도는 초기부터가 아니라 후대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신이 최초의 인류를 창조한 후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명한 바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독신이 교리화되지는 않았으며 결혼한 성직자들도 많았다. 카톨릭에서 초대 교황으로 간주하는 베드로는 실상 기혼자로서,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성직자 및 수도자의 독신은 카톨릭 교회에서 정한 법 가운데 하나로, 수도자는 부제 서품을 받을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평생 정결하게`(독신으로) 살아갈 것을 서약하게 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소속의 이창영 신부는 카톨릭의 독신 제도는 서기 386년 시리키우스 교황의 지시에서 처음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교회법으로 인정된 것은 5세기 초, 이노센트 1세(재임 402∼417) 교황에 의해서다. 독신 제도가 교황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가 하는 반대의 목소리도 높았으나 교황청에서는 이후 일관되게 성직자들의 독신을 요구해 왔다. 결국 독신 제도는 종교 개혁의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최근 1962년에 개최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카톨릭 교회는 독신 제도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확인했다. 이창영 신부는, “독신 제도는 신법(神法)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제정된 교회법(敎會法)이므로 개정의 요구가 있다면 언제든지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하여 바꿀 수 있지만, 현재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사제들이 독신 제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론은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여성=죄악이라는 편견과 처녀성의 숭배
그러면 무엇 때문에 카톨릭 교회는 수도자들의 독신을 요구했을까? 독신 생활만이 신 앞에 인간의 정결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결혼 생활 자체가 정결하지 못한 죄악일까?
로마 카톨릭은 성모 마리아의 `무염수태`, 즉 마리아는 인간이었지만 육체적 관계 없이 임신·출산을 하였고, 예수 출생 이후에도 동정을 지켰으며, 죽을 때까지 순결하게 동정을 지킨 영원한 처녀였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처녀성, 즉 순결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는 육체 관계=죄악이라는 관점이 적용되고 있다. 불교와 카톨릭 같은 이른 바 `세계 종교`에서 나타나는 독신 교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성=육체관계=죄악`으로 바라보는 교리상의 편견을 지적한다. 남성 중심의 종교가 여성을 유혹자, 또는 죄 자체로 설정함으로써, 남성 성직자나 수도자의 경우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죄악에 물들 수 있으므로 독신을 통해 순결을 지켜야 하고, 여성 수도자는 본래의 죄악이 드러나지 않도록 독신을 유지하여 순결을 지킨다는 논리를 보이고 있다는 것. 이는 남성 우월주의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에서는 비구니(여성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은 348계로, 비구(남성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 250계보다 백 가지 정도가 많으며,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카톨릭 수녀들의 독신 생활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숭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성처녀로서의 마리아 신앙은 고대 바빌론과 그리스, 로마의 처녀신 숭배와 맥락을 같이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처녀신이자 불의 여신인 베스타를 섬기는 여사제 집단이 있었고,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이와 비슷한 여사제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 집단에서 성모 마리아를 흠모하며 순결을 서약하는 중세 수녀원의 근원을 찾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육욕에 물들지 않은 처녀야말로 죄악이 드러나지 않은 순수하고 거룩한 존재이며, 육욕을 참지 못하고 결혼한 여성의 경우라면 남편(남자)에게 절대 복종하고 자식을 낳아 기름으로써 자신의 죄를 참회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카톨릭의 기본적인 태도였다.
독신 제도의 사회 경제적인 효과
에두아르트 푹스는 그의 저서 <풍속의 역사>에서 중세 수도원이 독신 생활을 요구하고 나온 것은 경제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도사와 수녀의 독신생활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였다. 카톨릭 세력이 전 유럽에 영향력을 미치면서 수도원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권력과 부를 장악한 수도원의 재산을 수도사들의 자식들에게 분배하는 일이 없이 수도원이 관리하기 위해 독신 제도를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논거로, 수도사들이나 수녀들에게 `결혼`은 금지되었으나 `동거`는 가능했던 점을 들고 있다. 교회법상, 성직자들이 일정한 세금을 내기만 하면 첩을 거느릴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11세기에 성직자의 대처(帶妻)를 금하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결혼법이 제정된 이후로도 축첩은 허용되었고, 동성애 또한 음성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따라서, 결혼을 안 할 뿐이지 성적 만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모순에 대해 14세기에는 성직자들의 대처 문제에 대해 논쟁이 재개되자 많은 성직자들이 결혼을 허가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푹스는 카톨릭 교회가 성직자들에게 매년 축첩세를 부과하거나 교황이 `신성한 분노`로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수입을 올리고 죄인을 정죄했다`고 덧붙여 적고 있다.
중세 수도원에서 독신 제도의 경제적 효용은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불교와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태조의 숭불정책에 따라 크게 번성했다. 권문세가를 비롯한 왕족들까지 출가하기도 하여 점차 사찰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였으며 권력을 등에 업어 이에 따른 폐단이 많았다. 고려 말, 불교도의 타락에 대한 비판은 `욕심을 적게 해야 하는 교(敎)를 믿는 자들이 금전욕과 정욕을 더욱 밝히고 있다`는 데에 집중되었고, 조선 왕조의 개국 후 성리학자들에 의해 척불론이 더욱 강하게 대두하게 된다.
카톨릭 신부의 에이즈 감염률, 일반인의 4배
청정 무구한 삶을 추구하며 신 앞에 자발적으로 헌신한다는 의미에서 독신 제도는 거룩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발적이 아니라 타율적인 법으로 독신이 규정될 때, 억눌린 본능은 파행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황진이의 유혹으로 파계한 지족선사의 이야기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야기이겠지만, 오래된 수녀원의 연못에서 아기의 유골이 수도 없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수녀원에서 발생한 영아 살해 이야기는 최근 <신의 아그네스>라는 유명한 영화 및 연극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수도원의 근처에 유곽이 번창했다거나 승방(僧坊)이나 수도원의 일부에서 동성애가 성행했던 역사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여성과의 동침보다 남성끼리의 동침이 죄가 차라리 가볍게 여겨졌지만 이에 대한 신의 뜻은 성직자들의 생각과 다른 듯하다. 지난 1월 말, 미국에서 신부의 에이즈 사망률이 일반인들의 네 배에 달한다는 외신 보도가 있어 잠깐의 파문이 일었다. 미국 캔자스 시에서 발행하는 스타지에 따르면, 신부들의 사망진단서를 분석한 결과 신부의 에이즈 사망률은 일반인보다 적어도 네 배 가량에 달하며, 설문조사에 응답한 신부 열 명 가운데 여섯 명이 `에이즈와 관련된 질병으로 주위 신부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3분의 1이 에이즈에 감염된 신부를 알고 있었다. 신부들이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윗사람에게 고백할 경우 대개 내부적으로 조용히 처리된다고 한다.
교황청은 이 사실에 대해 정확한 논평을 거부했다. 스타지는 캔자스 시 성 죠셉 관구의 레이몬드 볼런드 주교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는 에이즈로 인한 사망이 `신부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짤막하게 언급했다.
성직자도 인간이라면 독신 제도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든 독신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육욕이라는 `번뇌`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다한 전설과 동서양의 중세 연극에서 보여주는 파계승에 대한 민중의 야유가 뒷받침하듯 본성을 억누르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신을 위한 자발적인 독신은 아름다우나 법으로 강제할 사항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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